3·1운동과 보재 이상설
정덕희 진천군 문화복지국장
2025-02-27 충청투데이
독립운동의 그 뜨거운 피가 찬연하게 흐르는 곳이 바로 생거진천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대부이며 헤이그밀사로 잘 알려진 보재 이상설선생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고 일제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남만주 삼천중의 한 명인 동천 신팔균 장군, 간호사 신분으로 신팔균 장군과 결혼해 여성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임수명 동지, 문학과 독립운동을 위해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포석 조명희,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김구 선생의 경호역할을 수행했던 애국지사 오상근 등 진천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충북 3·1만세 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보재 이상설 선생의 충·효 사상과 독립운동 정신이 깃든 곳이다.
지난해 4월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독립운동 가치의 합당한 경가 및 기억계승방안 발표에 따라 독립유공자 공적 재평가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1962년 보재 이상설 선생의 서훈 당시 공적 내용을 보면 "헤이그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침략성을 통박하고 한국의 독립성을 주장해 많은 동정을 얻었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고 간략하게 돼 있다.
보재 이상설 선생의 서훈은 조국 독립을 향한 그의 여정에 걸맞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는 을사늑약을 막고자 고종에게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최초의 신학문 민족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해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제2의 만국평화회의 특사 중 정사로 파견돼 세계언론인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동양평화사장을 주장했으며 미주에서 애국동지회와 국민회를 조직했다. 13도위군을 편성해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한인독립단체인 권업회 창설, 상해임시정부의 전신인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신한혁명단 창단 등 국권회복과 해외독립운동의 선구자로 평생을 바치셨다.
선생의 동양 평화 정신은 3·1운동의 토대가 돼 아직도 아시아 각지의 민족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하나로 묶어 전개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들불처럼 전개될 수 있었으며 이는 진천의 독립운동가들의 열렬한 독립운동 정신이 그 밑거름이 됐다.
광복 80주년 3·1절을 앞둔 오늘 보재 이상설 선생의 보훈 훈격이 합당한 평가를 통해 대한민국장으로 서훈 승격이 이뤄지길 간절히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