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여자라서 못한다?
정순진 대전대 교수·대전여민회 회장
2003-02-22 대전매일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촌언니들은 학교만 졸업하면 다 가발공장에 취직해 일하며 월급을 몽땅 부모에게 보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실직을 하고, 또 50대 초반에 암으로 돌아가셨어도 다섯 자매 모두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신념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확고하게 믿었지만 대학을 나온 뒤 난 오랫동안 어머니의 신념에 의문부호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달리 사회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일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아니 난, 운 좋게 딸을 차별하지 않는 어머니를 만나서 가난한 살림에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다. 여자들 삶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눈을 뜨고 보니 난 몸만 여자였지 정신은, 마음은 남자였다. 여성적인 것은 열등한 것임을 저절로 익혀 내 안의 여성성을 억압한 채 남성적인 방식으로 살고자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사회는 남성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남성적인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남자들은 그건 아주 아름다운 가치이니 여자들은 계속 참고, 기다리고, 보살피면서 살라고 우겨댄다. 하지만 여성적인 것이 열등한 대접이나 받을 뿐임을 잘 아는 여자들이 무엇 때문에 여성성을 키우겠는가?
그들도 몸만 여자일 뿐 자기 안의 여성성을 한껏 억압하며 남성성을 키워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아름다운 가치라면, 더구나 유사 이래 계속해서 여자들이 참고 기다리고 보살피며 살아 왔으니 이제 남자들이 좀 그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라고 코방귀를 뀔 뿐이다. 남자든 여자든 거칠고, 공격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변해 버린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자기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고루 발현시킬 때만 원만하고 웅숭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같은 힘으로 작용할 때만 원이 만들어지듯이.
난 여자라서 못할 일은 없다는 어머니의 신념에 달았던 의문부호를 감탄부호로 바꾸고 싶다. 입장 바꿔 남자라서 못할 일은 없는 세상을 여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느리긴 하지만 세상도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