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의 죽음·신검의 항복…왕건, 이곳에서 대업을 이루다
2019-02-07 충청투데이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14 견훤의 최후와 개태사
고려에 패한 후백제 황산벌로 후퇴, 내부분열·사기저하… 견훤마저 투항
장남 신검 항복 장소… 개태사 추정, 견훤 죽음 후 연무읍 언덕에 매장
개태사… 고려 ‘전승기념사찰’ 의미
이렇게 후백제군이 쉽게 패퇴한 데는 내부의 분열과 사기저하가 큰 원인이었다. 우선 후백제를 세우고 기세등등하던 견훤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렇게도 왕건과는 앙숙이었고 수없이 왕건을 공격했던 후백제의 견훤이 왜 백기를 들고 왕건진영에 들어갔을까?
왕건은 그를 상부(尙父)라 하여 깍듯이 모셨다. 그러니 왕권을 둘러싼 부자간의 내분에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진영을 이탈하여 고려에 항복하는 군사들이 계속 늘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신검은 후백제의 중신들을 거느리고 왕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윤용혁 교수(공주대), 김갑동 교수(대전대) 등 고려사 전공학자들은 항복한 장소를 지금의 연산 개태사가 있는 황산벌로 주장하고 있다.
물론 견훤이 죽은 것에 대해 등창병이 도져 죽은 것이 아니라 암살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추리도 있다. 어쨌든 오래 끌어오던 고려 왕건의 통일 성업은 견훤의 죽음, 신검의 항복으로 개태사가 있는 황산벌에서 완성된 셈이다.
그러면 여기서 왕건은 왜 전쟁의 종착역 연산에 개태사를 창건했을까? 고려의 통일을 염원하며 936년 시작된 개태사는 940년 12월에 완공됐는데 이때 태조 왕건이 '낙성화엄법회'를 열고 친히 소문(疏文)을 지어 올렸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통일을 위해서 그리고 통일을 완수한 것을 기념하고 앞으로 고려왕조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이 바로 개태사 창건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김갑동 교수는 개태사의 창건은 곧 '전승기념사찰'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개태사가 우리 충남에 있고 고려 왕건 태조의 웅대한 꿈이 서려 있는 곳이 바로 天安임을 생각하면 충남의 역사적 위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