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애받던 영웅호걸 유청신…마침표는 달랐다
2018-11-22 충청투데이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3.天安 호두나무에 얽힌 高麗 風雲
유청신, 말단서 첨의정승까지 올라, 원나라 감시피해 호두 숨긴채 귀국
권력 남용 ‘간신’ 오명… 이국당서 죽음, 손자 유탁, 공 세워 시중에 이르러
공민왕 일탈 막아서다 참수형 당해
유청신(柳淸臣)-고려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때의 인물이다. 그는 1257년 전라도 고흥에서 태어나 젊은 날을 '부곡(部曲)’이라고 하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관리하는 말단 지방 관리로 보냈다. 이 신분으로는 최고 올라가야 5품이었는데 그는 유리천장을 뚫고 3품에 올랐으며 이어 장군이 되었고 첨의정승까지 오르는 전설적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임금까지도 좌우할 만큼 권력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가 남긴 업적이 충신에 오를 만큼 평가받을 만 하다. 그러나 유청신은 과거를 잊어 버리고 그의 손에 잡힌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그 첫째가 고려를 원나라의 속령으로 편입해 달라는 청원을 올린 것. 둘째는 역시 고려 간신으로 오명을 남긴 오잠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숙왕 폐위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 속령이 되는 것도 충숭왕 폐위도 모두 실패하고 1329년 이국당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는 고려말기 무능하고 부패한 국정과 왕실의 타락에 실망해서 그런 배반을 했는지 모르지만 '고려사'는 그를 간신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손자 유탁(柳濯)은 달랐다. 유탁은 무신이었으나 학문이 깊고 백성들과 늘 가까이 하려고 했으며 공민왕 초에는 전라도만호로 임명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전공도 많이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1362년 좌의정, 우의정을 거쳐 지금이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시중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인생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사단은 그를 신임하던 공민왕에서 비롯되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 노국공주가 일찍 죽자 공민왕은 너무 슬픔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고 궁녀들과 변태를 부리는 등 그 일탈이 극심했다. 그리곤 마침내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추모하는 영전을 호화롭게 건축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집행하려고 했다. 유탁은 더 참지 모하고 공민왕에게 재정집행을 취소하도록 간청하기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파직과 함께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공민왕은 그렇게 아끼던 유탁의 목을 베는 참수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고려사는 그를 고려 충신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천안 호두과자는 전 국민의 사랑받는 명물이 되었다. 역사는 이렇게 강물처럼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