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한 성순태 씨 지난달 24일 사촌형 만나

“돌아가신 아버지·삼촌 한(恨) 달랬습니다”

2018-09-02     진재석 기자
2박 3일 한없이 짧기만해, 얼굴형 닮아 순간 알아봐
온종일 집안 이야기 나눠, “오랜 시간 함께 있고싶어”

지난달 24일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2차 행사에서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성순태, 성근제, 성명제, 성익순, 성명희 씨. 성순태 씨 제공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는데 2박 3일의 시간은 짧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와 삼촌, 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 시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고(故) 성백래·성백수 씨 형제는 남북분단으로 살아 생전 두 번 다시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다.

이들의 한(恨)과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두 사람의 아들이 만남으로써 대신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충북 영동 출신인 성순태(66) 씨와 그의 사촌들(성명제·성익순·성명희 씨)은 북측의 그리운 가족을 만날 남측 이산가족 2차 상봉단으로 포함 돼 지난 달 24일 북에 있는 사촌 형 성근제(73) 씨를 금강산에서 만났다.

성순태 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촌 형이었지만 얼굴형이 같아서 그런지 만나는 순간 묘하게 알아봤다”며 “함께 간 사촌들 역시 사진 속 할아버지 얼굴과 똑같이 생긴 사촌 형을 보고 모두 놀랬다”며 첫 만남의 순간을 기억했다.

소위 ‘지식인’이었던 삼촌 고(故) 성백수 씨는 광복 직후 사회주의 체제를 동경해 1947년 자신의 가족과 함께 월북했고, 두 번 다시 가족과 만날 수 없었다.

성 씨의 아버지 성백래 씨와 그의 삼촌은 집안의 셋째·넷째 아들로, 집안 여느 형제보다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성 씨는 “아버지는 항상 ‘영화감독인 백수 삼촌은 아버지 형제·자매 중 가장 똑똑하고 총명해 가족 중 가장 많은 교육을 받아 집안에 큰 자랑이었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며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면 어김없이 삼촌이야기가 나왔고 가족 모두가 그리워했다”며 삼촌에 대한 기억을 회상했다.

성 씨의 아버지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은 채 숨을 거뒀고, 성 씨는 가족과 자신의 삶을 이어오기 위해 매일을 정신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달 초 성씨는 북에서 자신과 사촌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 북으로 간 고(故) 성백수 씨 결혼식 사진. 성순태 씨 제공
그는 “8월 초 북측에서 남측가족을 찾는다고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며 “항상 가족, 사촌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막상 연락이 오니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기에 가족들과 다 함께 협의했다”고 말했다.

이어 “회의 중 문득 가족과 뿌리를 향한 그리운 마음은 남이고 북이고 한마음 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족 모두와 함께 만남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와 가족들은 북에 있는 사촌 형에게 건넬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했다.

고향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게 고향 정경 사진과 할아버지 산소 사진을 비롯해 추운 북한 날씨를 고려한 다양한 방한복들, 북에서 맛보기 어려운 주전부리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갔다. 그렇게 가져간 짐만 다섯 보따리다.

성 씨는 “무엇을 준비해 가도 (사촌 형이) 기쁘게 받겠지만 대충 고를 순 없었다. 혼자 다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가족과 친구 등과 함께 쓸 수 있게 많은 물품을 준비해 갔다”고 말했다.

이번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질문에 그는 “만나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눴다”며 “하루는 온종일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집안 이야기를 나눴고 또 자식 이야기와 먹고 사는 일상적인 대화만으로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고 답했다.

이어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나지 않았고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몰랐다”고 덧붙였다.

성 씨는 “언제 우리가 다시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날지, 북측 가족들은 언제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냐”고 회한에 섞인 말을 남겼다.

진재석 기자 luck@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