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속 역사이야기⑥]신경직 LH공사 충북본부 부장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仁祖)는 역대 그 어느 왕보다도 시련이 많았던 임금이었다. 외침이 아닌 내란(1624년 이괄의 난)으로 한양 궁궐을 떠나 공주의 웅산성까지 피난을 떠난 최초의 왕이었으며, 시대착오적인 친명(親明)정책으로 정묘호란(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두 번씩이나 겪게 되면서 삼전도(三田渡)의 치욕과 함께 청(淸)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런 파란만장한 생애여서인지는 몰라도 유독 인조는 오욕적인 지명을 많이 남긴 임금으로, 우리고장에도 인조와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서 전해진다.

충남 공주시 우성면은 당진~대전고속도로(30번)와 서천~공주고속도로(151번), 천안~논산고속도로 등의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 부각된 곳이다. 우성면(牛城面)은 본래 우정면(牛井面)이라 불리던 곳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당초 우정면과 성두면(城頭面)을 각각 합성해 생겨난 지명이다. 이괄의 난 때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해 공주의 쌍수산성(현재의 공산성)으로 피난할 때 이곳을 지나게 됐다. 이때 인조가 타고 있던 말이 기갈이 몹시 심해 헉헉거리며 이곳의 우물물을 마셨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우물을 임금의 소가 마신 우물이라 하여 소우물(牛井)이라 하였고, 면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천안시 성환읍의 왕림리(旺林里)는 대부분이 농촌지역이지만, 최근 인근에 산업단지가 조성 중에 있어 개발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지역이다. 왕림리는 직산군 이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왕지리(旺池里)의 ‘왕’자와 임리(林里)의 ‘임’자를 따서 왕림리라 하여 성환면에 편입됐다가 읍으로 승격된 후 성환읍 왕림리가 됐다. 이 왕림리 한 가운데에 왕지(旺池)마을이 있다. 왕지란 우물이 있어 왕지마을인데, 이 우물은 물이 대단히 차고 수량이 많아서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왕지라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파천할 때 왕지산에서 쉬면서 우물을 길어다 마시고 크게 칭찬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마을 아래 부분에 왕지저수지, 왕지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이 지명들도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 와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에는 인차리란 지명이 있다. 이곳의 지명은 인조가 이곳으로 행차했다 해 유래된 지명인데, 인조관련 지명이 대부분 인조의 무능을 비꼬는 지명인데 반해 이곳 지명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지명이 아닌가 한다. 인조가 보은을 가기 위해 이 곳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加德面)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비록 좋은 이불과 베개는 아니었으나 잠자리가 매우 편해 인조는 여정에 따른 피로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다음날 인조가 그 까닭을 알아보니 이곳 산세가 매우 부드럽고 백성들의 덕이 후(厚)한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인조는 이곳 백성들이 지닌 덕에 더욱 덕을 더하도록 하라고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을 명이 ‘덕(德)을 더하다(加)’란 뜻의 ‘가덕’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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