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조일현 사진작가

늦은 밤, 전화벨 소리와 함께 굵고 우렁찬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외출복을 꿰입고 그를 만나러 가는 중에 그와의 기이한 만남이 아른거리며 떠오르고 있었다. 유복한 가정이었고, 남달리 공부도 잘했던 그가 어찌 고등학교 과정을 제대로 마칠 수 없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 즈음엔 나도 학교를 작파하고 집에 있던 터라 자연스레 그와 어울리긴 하였는데, 단순히 학교의 규율에 멀미를 느꼈던 나완 다른 무엇이 있었지 싶다. 그 무엇이란 그의 태도로 넘겨짚을 뿐인데, 아마도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낭인 기질이 생래적으로 몸에 배어있었던 것 같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찾곤 했다. 우린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버너와 코펠을 챙겨들고 시냇가로 나간다. 서덜이 있고 그 너머로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시냇가엔 몇 그루의 미루나무와 버들이 늘비하게 서 있었는데, 이곳은 햇볕을 가리고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쫒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목욕을 하고 피라미를 쫓다가 허기가 지면 준비해간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전부였다. 간혹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청춘의 몸이 닳아 오르면 소주 한두 잔으로 울분을 달래곤 했는데, 그나 나나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하는 정도여서 기껏 마신 술을 토악질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날은 대부분 신작로 길을 가득 메운 하굣길의 춘추복 차림에 검은 색 가방을 단정히 든 여학생 무리와 그 속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질주하는 내 또래 남학생들을 먼 둔덕에서 멀거니 바라본 뒤였다.

이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 것은 그가 충청도 어느 명문학교로 떠나고, 난 나대로 서울의 어느 학교로 적을 둬 시골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늦깎이로 지방대에 입학했을 때이다. 느닷없이 만났다. 그가 입을 열었다. 충청도 어느 학교로 갔었지만 거기서도 적응을 못해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래 몇 년을 떠돌다 마지막으로 그가 만난 곳이 철공소였는데,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있을 곳이 못되더란 것이다. 하여 대입검정고시 자격증을 따고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학사주점을 찾거나 인근 벤치에 앉아 한두 시간쯤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약속한 곳에 이르니 내외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취기가 오르자 그의 기세 좋은 입담이 시작됐다. 은행원으로 몇 년 있다가 조직 생활에 넌더리가 날 즈음 사표를 내고 둘이서 단출히 중국으로 떠났단다. 운남성에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차마고도를 거쳐 티벳을 왕복하는 가이드를 했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상흔도 씻을 겸 잠시 바람이나 쐬러 떠난 것이 십년 가까이 됐단다.

어느 인적 없는 사찰에서였단다.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인근 사찰이 궁금하던 차에 홀로 악산의 험로를 헤집고 올랐단다. 사찰의 입구가 보일 때쯤 바위를 등지고 앉았더랬다. 하고 보니 해거름이었고 삽시간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더란다. 때마침 절간에선 젊은 수도승들의 예불 소리가 산속으로 퍼져들고 발밑엔 들꽃 한 송이가 막 벙글고 있더란다. 그 속을 한 마리의 벌이 윙윙거리며 드나드는데, 수도승들의 예불 소리는 마치 운우지정의 교합소리처럼 귓속으로 잦아들더란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인간은 홀로 있을 때 비로소 환희감에 젖지만 무리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 같아, 우린 말없이 소주잔을 연거푸 털어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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