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칼럼] 본사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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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3월,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자 조정에서는 일본과의 외교적 분란을 멈추고 일단 통신사를 파견키로 했다.

정사(正使), 그러니까 외교사절단장은 황윤길(黃允吉)이었고 부사(副使)는 김성일(金誠一). 정사 황윤길은 서인(西人)이었고 부사는 동인(東人)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여·야가 공동으로 참여한 것. 그런데 김성일은 비록 부사지만 개성이 강하고 당의 배경까지 두터워 정사의 행동에 곧잘 브레이크를 걸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날 때 그 예를 임금처럼 해야 하는지를 두고도 두 사람은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1년이나 걸린 일본체류를 끝내고 귀국하여 선조 앞에서 귀국보고를 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말았다. 황윤길이 아뢰었다. "도요토미는 눈빛이 날카롭고 담략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또한 병선(兵船)을 많이 건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을 침략할 것이 확실합니다." 선조 임금은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고 중신들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부사의 보고는 이와 반대였다. "전하. 도요토미의 눈은 쥐새끼 같고 사람됨이 조선을 침략할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한 사람의 얼굴을 두고 정사는 '눈빛이 날카롭다' 하였고 부사는 '쥐새끼 같다'고 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한 사실(fact)을 두고도 당파에 따라 그 보는 것이 달랐던 것이다. 눈이 '쥐새끼' 같으면 어떻고 '사자눈' 같으면 어떤가? 그것이 조선침략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참으로 한심할 뿐이다. 그럼에도 조정은 격론을 벌인 끝에 주요지점에 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는 등 화평무드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듬해 도요토미는 15만 8700명의 육군과 9000명의 수군 등 20만 병력으로 조선침략을 개시, 1592년 4월 14일에 부산에 기습 상륙했다. 일본은 파죽지세로 북상했고 4월 29일 전쟁 보름 만에 선조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던 날은 달도 없고 비까지 내렸으며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임금의 행렬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요즘 방영중인 KBS-TV 사극 '징비록'에서는 선조 임금이 전란의 보고를 받고 고함을 지른다. "경들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거라 했는데 이것이 어찌된 일이요!"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고 무능한 왕은 눈물을 보일 뿐이었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한 김성일은 사실은 민심의 동요를 막고 내면적으로 대비를 하려는 뜻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그 책임을 물어 파직을 당했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에 의해 김성일에게 다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기회가 주어졌고 의병장 곽재우를 지원하는 등 혁혁한 활동을 전개하다 전쟁 중에 1593년 병사한다.

요즘 우리나라가 북한 핵미사일을 방어할 '사드' 도입 문제로 논란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역시 '사드'를 보는 눈이 임진왜란 때의 황윤길과 김성일처럼 정파에 따라서 그 보는 입장이 다르다. 국가안보는 정파를 초월하여 북한의 미사일을 막는데 그것이 필요하다면 어느 쪽 눈치 볼 것 없이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제2의 임진왜란, 제2의 6·25를 막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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