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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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부 帝王 無恥
狂歌亂舞(2)


잡답(雜沓)한 시정(市井)의 무수한 불빛들이 손에 잡힐 듯하고 왁자지껄한 잡음이 귀에 들릴 듯도 하건만 외인의 발길이 끊긴 밤의 여승방 정업원(淨業院) 경내(境內)는 쓸쓸하고 고요하기만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의관을 정제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손에 작대기를 든 종자 예닐곱 명을 거느리고 야음(夜陰)을 타서 정업원이 있는 동망봉(東望峰)에 숨어들었다.

단종(端宗)이 숙부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유배된 후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를 부인으로 강봉할 때 세조가 연미정동(燕尾亭洞)에 내려 준 집이 후에 여승방 정업원이 되었다.

폐서인(廢庶人)이 된 송씨가 따로 초가를 짓고 정업원 주지(住持)를 자칭하면서 불교에 귀의하였는데, 그 집 앞에 들산 봉우리가 있어 송시가 때때로 올라가 망부석처럼 하염없이 영월 쪽을 바라보곤 하여 동망봉(東望峰)이란 이름이 생겼다.

그런 애달픈 고사가 있는 정업원은 억불(抑佛) 정책에 눌려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한 탓으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퇴락한 여염집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형편이 되어 있었다. 산문(山門)도 없고 울타리가 둘러쳐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부처님을 모신 금당(金堂)과 선방(禪房), 강원(講院), 요사채와 객식(客室) 등이 명색은 다 갖추고 있었다.

목욕을 끝낸 여승들은 혹은 선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강원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두간 장방 크기의 강원에는 열예닐곱 살에서 스무 살 가까운 사미니(沙彌尼)들과, 같은 또래의 소녀 행자(行者)들이 여남은 명 모였다.

이미 득도(得道)하여 삭발한 지 얼마 안된 파란 머리의 사미니와 소녀 행자들이 서로 끼리끼리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등잔불 밑에서 야운비구(野雲比丘)의 자경문(自警文) 제팔(第八)을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하고 있었다.

莫交世俗 分他僧嫉 離心中愛曰沙門 不戀世俗曰出家….

<세속 사람을 사귀어 미움을 사지 말라. 마음에 애모함이 없는 사람을 사문이라 하고 세상을 버려야 출가라 하나니 이왕에 애모함을 끊고 세속을 하직하였거늘 어찌하여 흰옷과 다시 사귀려 하느뇨? 세속 일에 연연함을 도철이라 하나니 도철은 본디부터 도를 모르느니라. 출가한 본래의 마음을 어기지 않으면 산을 찾아서 묘지를 찾을지어다. 가사 한 벌과 바리 한 벌로 인정을 끊어 버리고 배부르고 주림에 걸리지 않으면 도는 스스로 높아지나니라.

모두 꽃다운 나이의 여인들이지만 세속 여인들이 찾는 욕망을 버리고 정토왕생(淨土往生)의 선업(善業)을 닦는 엄숙하고 경건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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