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을지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양윤석 을지대병원 교수
양윤석 을지대병원 교수

병원 로비 저만치서 백발의 환자가 환한 미소를 보낸다. 이 환자를 처음 본 건 1년 전 이맘때 주말 당직을 서던 날이었다.

20대 손자 보호자가 80대 자궁암 환자의 연명의향서를 보여주며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테니 치료해야 한다"는 설득 끝에 환자는 치료를 받았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참 좋다"는 말을 하면서 퇴원했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시작된 제도가 역설적으로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 혹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무지를 낳으면서 젊은 보호자가 잘못된 생각을 할 뻔했다.

생과 사 사이에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면서 산다. 사람 간의 관계에는 일정한 틀이 필요한데, 이것이 ‘규범’이다.

문제는 사회와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전과 다른 규범이 갑자기 생겨나고, 새로운 규범을 따라야 할 때 발생한다.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스의 ‘사실관계가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라는 명언처럼, 우리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로 세상을 살고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탕왕의 좌우명인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일 수도 있고, 철학적으로 보면 이데아가 아닌 질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즉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일 것이다.

생과 사 사이에서 깨지 말아야 할 규범은 바로 ‘인간 존엄, 생명 존중’이다.

이것만큼은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 났으므로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세계 인권선언 제1조로 1948년 파리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인권 규범이다.

2년 전 코로나로 혼란스러웠던 날들을 떠올려 보자.

한때 대역죄인 취급을 받던 확진자도 이제는 위로를 받고, 전 국민이 호패처럼 지니고 다니던 백신 패스도 자취를 감췄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노인에게 폭언을 하는 동영상도 있었다. 지금 팬데믹 상황이 급변하면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 코로나 확진자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2년 전처럼 코로나 확진자에게 위로를 준 사람은 있는가?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인간 존엄에 대한 감수성은 낮은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젠더 감수성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젠더 감수성보다 한 차원 높은 인간 존엄에 대한 감수성, 인권 감수성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근에는 환자가 희망할 시 의사 조력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한 조력 존엄사 법안까지 발의됐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가 만연해있는 상태에서 인간 존엄, 생명 존중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연명의향서나 조력 존엄사를 꺼낼 자격조차 없다.

다산 정약용은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으로 지으며 함부로 결정하는 삶을 버리겠다는 다짐을 했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평범하고, 그 평범성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인간 존엄, 생명 존중은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 항상 깨어있어야 지킬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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