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욱 ETRI 휴먼증강연구실 선임연구원

몇 년 전 필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리모컨을 대체하는 TV 조작 인터페이스 기술을 개발하는 과제에 참여했다.

시각장애인들이 TV를 시청한다는 사실이 일부 독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필자도 시각장애인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막연히 전맹 시각장애인만을 떠올리고 방송을 ‘본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의 약 5%를 차지하는 전맹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저시력 장애인이 있다는 것이다.

시야가 좁거나, 초고도 근시로 눈 바로 앞에 있지 않으면 뿌옇게 보이는 등 다양한 증상과 단계를 가진 장애인들이 많은 시간 동안 뉴스, 드라마, 스포츠 등 방송미디어를 소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각장애인 분들과 인터뷰를 통해 알아낸 TV 조작의 어려움은 리모콘을 찾기가 어렵고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버튼이 너무 많으며 현재 상태와 조작 결과를 알 수 없어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장애인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리모컨 없이 사용자의 동작 인식 인식으로 TV를 조작하는 인터페이스를 개발했다.

기존 출시된 스마트 TV에도 동작 인식 기능이 있었으나 손을 따라 움직이는 포인터로 화면에 나오는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라 시각장애인에게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시각장애인들이 쉽게 제스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포인터 없이 손의 직선 이동과 원 그리기 동작으로 주요 기능을 조작할 수 있도록 동작을 디자인했다.

“이 정도면 리모컨 없이도 편하게 TV를 조작할 수 있겠지”라는 필자의 기대는 실험을 진행하면서 오만한 착각임이 드러났다.

시각의 도움 없이 정해진 동작을 가르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사용성 평가 실험에 참여한 시각장애인들은 동작 인식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낯설어 했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동작 인식이 잘되지 않으면 더 이상의 동작을 주저하고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기술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함이 더 크게 보였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낯선 제스처 인식이 아니라 익숙한 리모콘과 동작 상태를 음성으로 알려주는 기능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시각장애인들이나 필자의 실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키보드에서 사용되는 영문 자판인 쿼티(QWERTY) 배열이 타자기 시절 키가 서로 엉켜 망가지지 않도록 일부러 속도를 느리게 만든 방식이고 드보락(DVORAK) 배열에 비해 효율성이 낮음에도 익숙하다는 이유로 타자기가 사용되지 않는 현재까지도 사실상의 표준으로 사용되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필자는 현재 촉감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촉감 기술은 모바일 기기, 가상·증강현실, 원격 작업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처를 가지고 있으나 인쇄물이나 영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각장애인들에게 기존의 점자를 대체하여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 개발되고 있는 원천기술의 혜택을 많은 사용자가 누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성능적 진보가 아닌 점진적으로 사용자들에게 노출되고 접하며 경험을 쌓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혁신적인 최신 기술과 옛것에 익숙한 사용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이 과정에서 충분한 사용자 중심의 고민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 해도 위와 같은 실패는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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