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충청북도의회의원

민주주의에서 공정(公正)은 빠질 수 없는 상수(常數)다. 그리고 우리는 늘 공정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되뇌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공정에서 일정부분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나는?'이라는 자책만 있을 뿐,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하에서 능력 또는 지위에 맞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에 공정의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사회적 능력이 배경에 의한 것임을 애써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은 자신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의 부작용에 대해 언급하고 공정이 정의라는 공식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렇듯 공정이라는 것은 현대사회 속에서 적지 않은 모순을 갖고 있다. 공정을 위해 투쟁으로 쟁취한 노동자의 권리! 하지만 노동조합이 노동계의 불공정 상황을 가중시킨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일부 대기업의 사례라고는 하지만 노동조합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등 기득권이 없는 소수자의 입장은 외면되기 일쑤였다.

대중과 친숙한 종교계는 또 어떠한가? 누구나 종교에 거는 기대는 동일하다. 빈부격차를 떠나 정신적·물질적·사회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을 주기 바란다. 그러나 IMF 시절 많은 국민들이 어려움에 세상을 등질 때 종교계는 그들을 돌보지 못했다. 코로나 확산 상황에서도 일부 종교계의 일탈은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공정한 사회란 무엇인가'의 저자 피터 코닝은 "공정은 집단의 행동으로만 성취할 수 있다"며, 각자 "언제나 공정한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필요한 변화를 향해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계층이나 직종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런 가운데 재난지원금 이야기도 연일 이슈가 되고 있다. 특히 공공복리를 위해 영업 제한과 금지된 자영업자의 한숨은 매우 안타깝다. 그들의 고통과 희생이 사회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논의는 백가쟁명(百家爭鳴) 뿐이다. 또 피터 코닝은 "인간의 이기심과 합리성을 강조한 자본주의는 극단적 빈부격차와 탐욕만이 있으며, 인간의 이타심(利他心)을 믿은 사회주의도 공로에 따른 보상을 무시해 실패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사회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비판이지만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공정사회는 결코 동등한 기회의 부여로 오지 않는다. 각자가 처한 위치, 환경, 그리고 태생부터가 공정을 훼손하고 있다. 모두를 평등하게 보고 똑같이 사랑한다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실천이 필요하다. 다만 자본주의에서의 공정과 민주주의에서의 공정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공정은 배려를 전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생산과 소득을 공정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행정으로 분배를 강제할 수는 없다. 어렵고 추상적일 수 있겠지만 사회적 배려만이 동등한 분배를 통한 공정을 이뤄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목표라면 모두가 기꺼이 동의하고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행정은 이러한 문화의 근거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나는 정치가 선의로 가기 위한 행정을 강제하고 조력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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