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술상용화센터장

10년 전 즈음인가? 미국 샌디에고에서 산·학·연 협력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느낀 세계적인 바이오 클러스터로서 생동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교수들과 주변 연구기관에 소속된 연구원들이 매일 저녁 시간에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수많은 교육프로그램을 개설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산학연이 함께 모이는 포럼에는 연회장이 미어터질 만큼 인산인해를 이뤘다.

예비창업자들이 사업모델을 발표하는 자리에는 먼저 성공한 선배 기업인이 후원해 줬음을 알리는 표식 아래에 각종 먹을 것이 가득 쌓여있었고, 또 다른 선배 창업자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들을 위해 진심 어린 멘토링을 해줬다.

게다가 지역신문에는 각종 기술 및 투자 설명회나 포럼, 교육 소식이 곳곳에 실려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산·학·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역시나 산·학·연 전문가들이 강의시간을 통해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너무도 멋지고 체계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그렇게 교육이 마무리될 무렵, 한 여성 교수가 끝으로 한 장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보여줬다.

샌디에고가 지금의 세계적인 바이오 클러스터가 되기까지 어떻게 성장을 이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그래프였다.

어떤 얘기로 강의의 대미를 장식할지 한껏 기대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교수는 마치 우리의 기대에 찬물이라도 끼얹고 싶었던 사람처럼 우려스러운 말투로 강의를 이어갔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배운 대로 한국에 돌아가 실행하기만 하면 곧바로 놀라운 성공을 거둘 것이라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에 기다리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좌절의 경험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배운 것은 무엇이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제대로 벤치마킹을 하려면 샌디에고에서 바이오 클러스터가 태동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30년 전 과정에 대한 통찰을 가져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냥 며칠 와서 대표적인 성공사례나 프로그램만 배워가면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제야 샌디에고 바이오 클러스터의 성장 그래프가 눈에 들어왔다.

태동 후 처음 25년간은 그래프가 거의 수평에 가까울 만큼 변화를 보이지 않다가 최근 5년여의 기간 동안 거짓말처럼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지지부진하던 실적이 갑자기 최근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게 된 것일까?

이어진 설명에 의하면, 지금의 성공은 산·학·연이 오랜 기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서로가 끊임없이 소통하며 공통의 경험을 축적했고 이러한 축적의 결과들이 한순간 폭발하며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 낸 산물이다.

산·학·연이 서로에 대한 협력경험을 축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프로그램이 매력적이라 하더라고 그것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성과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샌디에고처럼 우리도 3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시행착오를 똑같이 반복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산·학·연의 성공적인 협력을 바란다면 서로가 기꺼이 협력의 장에 나오기까지 경험을 축적할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샌디에고 바이오 클러스터에서 보았던 폭발적 성장의 짜릿한 경험을 우리도 맛보기 원한다면 성공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막막한 긴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샌디에고의 산·학·연은 협력을 인내하며 끝까지 고군분투하였음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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