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택 청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편견은 한 쪽으로 치우쳐서(偏) 바라봄(見)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무엇인가를 보고 죽기 직전까지도 뭔가를 보고 죽는다. 우리가 싫든 좋든 평생을 무엇인가를 봐야하는 것이다. 인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에 대해 경험하고 상상하며 삶을 산다. 이세상과 저세상, 이쪽과 저쪽, 이편과 저편, 왼쪽과 오른쪽, 나와 너와 같이 이분하여 상생과 상극을 반복하며 산다. 편견은 이런 나눔에서 서로 만나는 가까운 쪽이 아닌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서로가 공정하지 못하다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편견은 생산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못하다.

휴대폰과 변기 중 떠오르는 이미지로 그림을 그려볼 때, 어느 것이 더 더러운 이미지인가? 포브스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휴대폰에서 훨씬 더 많은 세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코카콜라와 펩시의 수십 년간 이어진 콜라 전쟁에서 펩시가 승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더 세련된 병'이었을까? 펩시를 승리로 이끈 것은 더 세련된 병보다는 '편견에서의 탈피'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수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핑크는 여자아이의 색, 파랑은 남자아이의 색, 메이크업은 여성이 하는 일, 부드러움은 여성적인 낱말, 강인함은 남성적인 낱말 등등.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편견은 색채에서부터 낱말에 이르기까지 참 다양하고 무궁무진할 것이다. 각 사회마다 공유하는 편견도 마찬가지다. 편견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놓은 '치우친 생각',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확증 편향'이다.

예술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편견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그 편협한 경계선, 고정된 생각을 허물 수 있는 자유로운 생각이 바로 예술의 근원이다. 가장 먼 쪽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경계 가까운 곳에서, 또는 그 경계를 넘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절대와 상대를 넘나들며 어떤 틀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의적으로 창조할 때 인간은 비로소 본능에 가까워진다. 이 창조적인 본능은 우리가 가진 '원래 ~은 ~거야', '~은 항상 그렇다.', '~ 때문에 ~할 거야'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때 고정관념을 떠나 '자유로운 생각'이 된다. 그럴 때 예술은 우리를 찾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 뉴욕의 앙데팡당 전시에 출품한 레디메이드 변기의 제목은 '샘'이다. 변기가 예술을 통해 샘이 되면서 편견은 예술로 승화되었다. 변기의 출품으로 모든 기성품은 미술의 주연이 될 수 있었다. 존 케이지는 소리를, 백남준은 비디오와 같은 영상을 미술의 주연으로 선물했다. 조지아 오키프는 시대적인 고정관념과 차별에 맞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이렇듯 예술가들은 편견을 깨는 것에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기성품, 소리, 비디오, 사막의 짐승 두개골, 뼈, 꽃, 식물의 세부기관 등 평범한 것들, 어쩌면 시선을 피하고 싶은 것들에게서 조차 아름다움을 찾아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예술이 이 세상의 모든 편견을 없앨 수는 없다. 편견을 없애기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무엇보다 포용적이다. 예술은 고정관념을 넘어서 다양한 세계와 다양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조지아 오키프는 "당신 손에 꽃 한 송이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순간만큼은 그 꽃이 당신의 우주입니다. 나는 그런 감동의 세계를 누군가에게 선사하고 싶습니다"라고 우리에게 편견 없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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