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성문 흔적·포곡식 성 동선 등 확인
문화재청 “수준 높은 축성기술 파악”

▲ 백제 판측층에 남아있는 판측틀의 흔적들. 부여군 제공

[충청투데이 유광진 기자] 부여군(군수 박정현)에서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의 허가를 받아 추진 중에 있는 부여 부소산성(사적 제5호)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성벽 관련 시설(추정 서문지)과 통일신라~고려시대에 걸쳐 거듭해서 쌓은 성벽을 확인했다. 이들 현장은 23일 오후 3시 부여군과 문화재청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됐다.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도읍기(538∼660) 왕궁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 북쪽에 있는 유적이다. 부소산성은 지역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에 자리하는데, 특히 왕실의 후원(後苑)이자 유사시 도피처로 활용돼 왕궁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980∼1990년대에 동성벽과 북성벽, 남성벽에 대해서만 발굴조사를 시행해 그간 서성벽과 서문터에 대해서는 정확한 범위와 축성 실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진행한 발굴조사에서는 서성벽 성문 흔적과 백제 포곡식(包谷式) 성(계곡을 감싸도록 성벽을 쌓은 성)의 동선, 배수 및 출입 관련 시설이 확인됐다. 또 부소산 남동쪽 정상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통일신라 테뫼식 성(정상부를 둘러 쌓은 성)의 축조 방식과 시기마다 달라지는 성벽의 변화 양상을 파악했다.

부소산성 백제 포곡식 성은 기본적으로 판축(板築, 흙을 켜켜이 다져 올리는 축조법)으로 축조됐다. 이외에 판축 외벽만 돌로 쌓은 양상, 두 겹 이상 판축한 모습, 내벽 경계에 석재를 이용해 배수로를 설치한 방식 등이 확인됐다.

서성벽 구간은 부소산성 성벽 가운데 중심 토루(土壘, 흙을 다져 쌓아 올린 성벽)가 가장 견고하고 반듯한 상태로 확인됐다. 성벽의 판축층 너비는 약 4.8∼4.9m이며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최대 4.4m 정도다. 또 성벽의 중심을 이루는 판축층의 내·외벽은 모두 흙으로 보강했는데, 일부는 가공한 석재로 마무리했다.

백제 포곡식 성은 통일신라에 의해 재차 보수작업을 거쳐 꾸준히 활용됐다. 통일신라 때는 성 안쪽 벽면에 와적층(기와무지)과 부석층(석재층)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성을 보수했다. 일부 구간에는 석렬(石列, 돌을 일렬로 쌓은 것)이나 석축을 덧대기도 했다.

추정 서문터 지점은 부소산 남쪽 기슭의 추정 사비 왕궁지에서 백제 사찰터인 서복사지를 거쳐 성 내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한다.

이곳은 원래 골짜기가 있던 곳인데, 조사 결과 백제 성벽 판축층 위로 암거(暗渠, 땅속에 설치한 배수로)가 형성돼 있었다. 문화재청은 "암거 상부구조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 주변으로 문지공석(성문 문짝 고정용 기둥을 끼우기 위해 구멍을 낸 돌), 원형 초석, 잘 다듬은 대형 가공석들이 산재해 출입 목적의 구조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백제와 통일신라 성벽이 연접한 지점에서는 백제 성벽 위로 통일신라 테뫼식 성벽이 축조됐다. 성의 외벽은 기존 백제 성벽을 고쳐 사용했지만, 내벽은 백제 성벽 위에 기단석축을 덧붙여 만들었다. 성벽 축성과정 중 유입된 ‘회창7년’(會昌七年)이란 새겨진 명문기와가 출토돼 성벽 조성 시기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됐다. 회창(會昌)은 당나라 무종 때 연호로, 회창 7년은 847년을 말한다.

문화재청은 "이번 서성벽과 추정 서문터 확인을 통해 성벽의 실체와 축성 기술을 파악할 수 있었다"며 "이런 성과는 최근 한성기와 웅진기 왕성인 풍납토성, 몽촌토성, 공산성의 최근 발굴 성과와 함께 백제 중앙의 수준 높은 축성 기술과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부여=유광진 기자 K7pen@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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