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겸 건양대학교 명예총장
의사·교육인으로 살아오며 보람 느껴
인간의 육체·정신 살리는 일… 큰 기쁨
총장직 은퇴 후 문학·심리학 등 공부도
1962년 김안과 개원 ‘환자 중심’운영
연중무휴 원칙, 신속진료 서비스 목표
현재 전국 안과병원서 최고 평가 받아
5월 병원 오픈 준비 중 환자 편의 초점
'건강증진·예방' 차원 제반 시스템 갖춰
로봇·초정밀 AI 활용 의료제공도 검토

[충청투데이 김흥준 기자] 빵총장, 담배꽁초 총장, 나비넥타이 총장, 작은 거인, 영원한 현역, 지역의 큰 어르신, 그동안 건양대학교 설립자 김희수(94) 명예총장의 별칭이다. 그의 얼굴엔 항상 젊음의 열정이 가득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고 있다. 고령의 나이에도 언제나 젊은 에너지를 잃지 않는 김희수 명예총장, 그를 만나 그동안 삶의 발자취를 들어봤다.

-요즘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

“4년 전에 총장직을 사임한 후부터는 짜여진 일과에서 벗어나 그동안 학교 일 때문에 못했던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저는 평생 안과의사로서, 총장으로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그간 못해본 일을 하자고 마음먹고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력을 키우고 싶어 문학, 철학, 유학, 사학, 심리학 분야의 전문가를 가정교사로 모시고 각 분야에 대해 몇 달씩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의 도를 닦기 위해 서예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또 감성을 키우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하모니카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체력단련을 하고 요가를 매주 하고 있다. 그래서 몸이 매우 유연하다. 일주일에 한번 씩은 친구들은 물론 후배들과 골프도 하고 있다.”

-연세에 비해 매우 젊어보이신다. 젊음의 비결이 있다면

“특별한 건강은 긍정적인 생각과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 덕이다. 우선 기본적인 신체조건이 건강하게 태어난 것 같다. 그렇지만 저도 평생을 부단하게 건강을 위해 노력해 왔다. 젊은 시절에는 너무 바빠서 제대로 운동을 못했지만 중장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건강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건강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우선 매일 만 보를 걸으려고 노력했고 층계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가능한 한 걸어 올라간다. 특별한 약을 먹지도, 운동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그리고 도시간 이동을 할 때는 절대로 자가용을 타지 않는다. 서울서 대전 건양대학교로 오갈 때도 KTX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한다. 덕분에 우리 학교 비서실에서는 매일매일 기차시간 알아보고 기차표 사느라 바쁘다. 또 지하철을 타면 경로우대로 차비도 면제 받고, 운동도 하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의대를 졸업하던 때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철도병원 인턴에 합격한 뒤 고향 논산에서 잠시 머물때 아픈 상처가 있다던데.

"1950년 6월 17일에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 7월 1일부터 용산에 있는 철도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래서 한 보름간 고향에서 쉬었다가 서울에 올라오려고 졸업식 이튿날 논산에 내려갔다. 그런데 6월25일 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가 우익 인사로 지목되어 지역인민위원회에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오셔서 다행이었지만, 서울의 집중폭격된다는 소식에 내가 대학4년 간 기숙했던 둘째 형님댁 소식이 너무 궁금했다. 형님댁이 용산의 철도병원 부근에 있었는데, 당시 출입증이 없으면 서울에 갈 수가 없었다. 9·8 수복이 되자마자 서울에 급히 올라가보았더니, 둘째형님 댁이 폭격을 당해 조카딸 하나만 남고 나머지 전 가족과 누님 한 분이 한꺼번에 희생된 것을 알았다. 보름 이상을 엉엉 울었는데 나중에 '눈물이 말라서 나올 눈물이 없어 못 울었다.'는 소리를 실감할 정도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고향에 가지 않았다면, 나도 60년 전에 북한의 폭격으로 둘째형님가족과 함께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람의 생사라는 것이 순간에 갈리는 경우를 겪어보면, 자신의 인생 앞에 경건해지고, 한번 왔다가는 인생을 정말 값지게 살다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다고 들었는데.

"당시 나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당시 4살배기 딸을 둔 신혼부부였는데 가족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오르는 것 자체가 인생의 크나큰 도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50불 정도였다. 먼 장래를 위해 선진의학을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한미재단에서 주선해주는 군함을 타고 15일의 항해 끝에 미국에 갔다."

-1962년 서울 영등포에 김안과를 개원해 현재 전국 안과병원에서는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을 갖췄다고 평가하고 있다. 개원당시 안과운영은 어떠했나?

“개원할 때 영등포는 서울의 반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지역은 넓었지만 사실상 서울의 변두리였다. 당시에는 영등포구가 지금 동작구에서 김포공항까지였다. 구로동, 목동 할 것없이 전부가 영등포였다. 당시에는 의사가 개업을 할 때, 서울시내의 경우 개업하고 싶은곳에 마음대로 개업이 안되던 때였다. 정부가 개업해도 괜찮은 지역을 정해주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영등포를 택해 김안과 문을 열었다. 당시 신흥인구밀집지역이기도 했고 공장에 다니는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환자가 없어서 전단지를 만들어 영등포는 물론 수원, 안양까지 쫓아다니며 담벼락에 직접 붙이고 다니면서 병원을 알렸다. 하지만 개업하면서 내 스스로 '적어도 10년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안과로 키우겠다'고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했다. 나는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은 서비스업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김안과의 성공은 환자를 왕으로 알고 고객 만족의 병원 운영을 고민하고 실천한 결과라고 본다. 당시만 해도 모든 병원은 6시에 문을 닫고 당시 의사들은 대단한 권위의식을 가지고 병원운영을 했을 때다. 환자가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아라는 식, 요즘의표현을 빌리면 '공급자 위주의 진료'를 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역발상의 병원운영방식을 시도했다. ‘환자제일주의' 철학을 중심에 세우고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설립 초창기부터 365일 24시간 연중무휴 원칙을 세우고, 설날, 추석 등 공휴일은 물론, 한밤붕이나 새벽에라도 눈이 아픈 사람은 누구든 신속하게 진료받도록 했다. 이로써 환자들 머릿속에는 "김안과병원에 가면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놓았고, 그렇게 쌓아온 신뢰가 병원의 '영속성'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미 60년대 말쯤, 전국에서 엄청난 환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가 병원에 안과의사 10명이 진료를 볼 때인데, 우리 병원에서 하루 3000명 환자를 진료한 적도 있다. 김안과병원 초창기에는 점심을 거의 먹어보질 못했고 저녁도 마음 편히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밥 먹다가도 환자 오면 수저 놓고 달려나가고, 환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보고 “밥 먹고 온다”는 말을 못해서 점심이고 저녁이고 제때 먹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카드나 이런 게 전혀 없을 때라서 무조건 현금 아니면 외상이다. 매일 진료를 마치고 돈을 다 셀 수 없어서 은행직원이 와서 돈을 세어서 바로 가져가곤 했다.”

-대학관련, 무관한 이야기인데, 김종필 전 총재님과 학교를 같이 다닌 것으로 안다. 총장님께서 정치를 하셨다면 잘 하셨을 거라고 애기가 많이 나오는데.

"나는 정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때 유혹을 많이 받았다. JP도 그렇고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정석모로부터도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치란 것은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잘한 선택이다."

-오는 5월중에 개원을 목표로 새 병원 오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아는데

“오는 5월 개원을 목표로 새 병원 오픈을 준비 중이다. 새 병원은 단순히 병상수를 늘린다는 차원이 아니라 모든 시설과 구조를 환자의 편의에 초점을 맞췄다. 새 병원은 정밀의료 서비스를 필두로 '건강검진'의 개념이 아닌 '건강증진과 예방'차원의 제반 시스템도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동안 여러 여건상 시행하지 못했던 호스피스 병동이라든지 회복기 재활센터 등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IT시대에 걸맞은 최첨단 시스템을 구축하고 로봇수술, 초정밀 인공지능을 활용한 의료서비스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을 가지고 지역의 대표적인 거점병원의 역할을 수행해 굳이 수도권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최첨단 병원으로 개원할 계획이다.”

-이제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인지?

“저는 평생을 의사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살아오고 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직업 같지만 그 본질은 같다. 의사는 인간의 육체를, 교육자는 인간의 정신을 살리는 일이다. 육체 없이 정신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건강한 정신이 없는 육체는 그저 물체일 뿐이다. 따라서 제가 하는 일이 온전한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존감을 키우며 개인과 사회를 위해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맡아 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큰 보람이다.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林尙沃)은 "이문을 남기는 장사는 작은 장사, 작은 부자지만, 사람을 남기는 장사는 큰 장사이고, 큰 부자다"라고 했다. 저는 젊은 시절 열심히 모은 전 재산을 쏟아부어 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지금은 큰 재산은 없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환자들과 우리 학생들을 생각하면 누구 못지 않은 큰 부자라는 생각이 든다.”

김흥준 기자 khj50096@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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