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섭 ETRI 융합표준연구실 실장

2월 11일 저녁, 설 명절을 앞두고 차례 음식 준비 등을 마치고 침대에 반쯤 기대어 노트북을 켰다. 최근 국제표준화 기구인 ITU, ISO와 IEC가 스마트시티 분야의 표준화 협력을 위해 결성한 J-SCTF 회의에 앞서 ITU 측의 준비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회의는 그리 오래 진행되지 않았다. 사전에 공지된 대로 딱 1시간 만에 회의는 끝났다.

이런 회의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열리고 있고, 요즘은 팬데믹의 영향으로 1주일 이상 연속되는 회의도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국내 회의도 온라인으로 개최되고 있다.

미국 애틀랜타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40여 시간 만에 아르헨티나 산타페라는 도시에 도착해서 2일간 회의 참석하고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7일짜리 출장에 비하면 몸과 마음이 훨씬 편하긴 하다.

제네바에서 진행되는 ITU-T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룡동 버스 정류장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고 출발하면, 제네바 근교의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곤 한다.

하지만 온라인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단지 노트북을 켜고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된다.

2010년 아이슬란드 화산폭발로 모든 항공편이 완전히 정지된 적이 있다. 필자는 제네바에서 회의를 마치고 귀국 예정이었으나 화산폭발로 제네바에 갇히게 됐고, 그 다음 주에 시작된 다른 회의에도 참석하게 됐다.

육로로 제네바에 올 수 있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표단이 참석할 수 없어 급히 온라인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처를 했으나 50여 명이 접속한 회의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돼 버렸다.

요즘은 기술의 발전과 팬데믹으로 인한 학습효과 덕분인지 100여 명에 가까운 대표단이 참석하는 온라인 회의도 아주 부드럽게 잘 진행되곤 한다.

벌써 1년 넘게 모든 국제표준화 회의가 온라인으로 개최되고 있으며 심지어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CES도 온라인으로 열렸다. 올해도 거의 모든 국제표준화 회의가 온라인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갑자기 찾아온 팬데믹은 우리 생활뿐만 아니라 업무 환경도 급격히 바꿔 놓았다.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과 업무 환경은 같은 방향으로 변화했으리라 짐작되지만, 팬데믹은 그 변화를 더 빠르게 만들었다. 팬데믹이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번 팬데믹이 바꾸어 놓은 우리 생활과 업무 환경은 지속될 것이다.

전에는 물리적인 참석이 어려워 대응하지 못했던 회의들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됐고 그만큼 참여해야 하는 회의가 급격히 늘어났다. 필자는 많을 땐 한 달에 유럽 지역 출장을 3번 다녀온 적도 있으며 이는 술자리에서 무용담으로 떠벌려질 정도로 표준화 업무를 전문으로 수행하는 필자가 속한 부서에서도 많은 회의 참석이었다. 그러니 이젠 필자가 속한 부서의 연구원들에게는 흔한 일상이 됐다. 물론 비행기는 안 타도 된다.

국제표준화 회의는 서로 다른 대륙에 있는 국가의 참석자를 고려해야 하고 회의를 주최하는 기술지원 인력의 근무시간을 고려해야 하므로 한국에서 참석하는 사람들의 경우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일과 시간 중 연구소 근무는 덤이다. 오늘 밤에도 나는 침대 위에서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ITU-T의 어느 그룹 회의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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