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식 신탄진중 교사

‘가르쳤지만 배우지 못할 수 있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익힐 수 있다.’ 교육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이며, 교육 목적, 방법, 범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말이다.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르쳤지만 배움이 생기거나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의도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학습이 일어날 수 있다. 학생이 생활하는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학습의 과정이다. 교육은 의도성에 따라 명확하게 나누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미묘하다.

교육은 가르친 만큼만 배우거나 배운 것이 가르친 것의 전부는 아니다. 하나를 가르쳤다고 하나만 배우는 것이 아니며, 하나를 배웠다고 하나만 배운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만을 배우는 예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는’이 중요하다. 교육은 수량화하기 어렵고, 경제 활동이나 투자처럼 투입이 산출로 반드시 나타나지는 않는다. 교육은 다양한 요소가 어울려 작용하는 복합적인 과정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복합적인 교육은 지향하는 철학, 중점을 둔 가치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동양과 서양, 고대·중세·현대라는 시공간의 차이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하나의 본질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도덕성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인성을 갖춘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덕성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친구를 집단으로 괴롭히고, 공공장소에서 웃어른을 상대로 폭언과 폭행을 하는 일, 교사를 폭행하는 일 등이 일어나고 있다.

학생들의 학습·학업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도덕성 교육은 형식 또는 교육 슬로건에 존재하고 있다. 일부 학생들의 일탈과 위법을 전체 학생의 잘못된 행동으로 생각하거나 교육 전체의 도덕성 교육 부재로 생각할 수 없다.

또,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본(本)이 되는 교사의 도덕성도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 그만큼 도덕성은 교육 주체에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이며, 교육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이 확립되면 따라야 할 올바른 도리가 생겨난다)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며, 한 번쯤 들어봤을 친숙한 말이다. 사회 현상 중에서 기본을 중시할 때 자주 회자하는 말이며, 교육에서도 빈번히 인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도리 즉, 교육의 근본은 ‘학생다움’, ‘교사다움’이다. 배움과 가르침의 주체인 학생,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을 바로 세울 때, 진정한 배움과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싹을 틔울 수 있고 그 싹이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출발이 된다.

다른 학생과 경쟁만을 배우는 것, 문제의 답을 찾는 방법만을 가르치는 것보다 귀중하고 긴요한 것은 학생은 학생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수업 한 교시 동안 이루어지는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 수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교사와 학생이 기본적인 예의와 높은 신뢰, 막힘없는 소통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기본’이자 ‘근본’이다.

교사를 대신해 무분별하게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가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교육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본(本)이 무엇인지 숙고(熟考)하고 숙의(熟議)해야 한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