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의병대장 최익현
왜양일체론 주장하며 지부상소 올려
단발령 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히기도
을사늑약 체결되자 의병일으켜 항일
대마도 유배된 후 단식… 73세에 사망
운구행렬 지나는 고을마다 애도 인파
부산~논산 상월 15일이나 소요되기도

▲ 최익현 동상. 청양군 제공

'콩밭 매는 아낙네야~'로 유명한 청양 칠갑산 초입 광장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이 의연하게 서있다.

이렇게 차가운 겨울바람이 칠갑산 산마루를 몰아치면 선생의 칼 같은 정신을 새삼 느끼는 것 같다.

또 칠갑산 아래 목면 송암리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모덕사(募德祠)가 있고 칠갑산 북쪽 예산 관음리에는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이처럼 청양 칠갑산은 최익현 선생의 발자취와 정신이 함께 숨 쉬는 곳이다.

정말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그 분처럼 혹독한 형극을 겪은 인물도 드물다.

그 첫 번째가 1873년 대원군과 명성황후(민비)의 권력 싸움이 치열할 때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것인데, 이 상소가 대원군 몰락의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동부승지에 까지 오른 관직을 삭탈당하고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두 번째는 1866년에 있었던 '지부상소'(持斧上疏).

이름 그대로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임금에게 상소를 하는 것인데 상소를 들어 주던지 도끼로 자기 목숨을 치라는 것이다.

▲ 면암 최익현선생 대마도유배도.  청양군 제공
▲ 면암 최익현선생 대마도유배도. 청양군 제공

이 때의 상소 내용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강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한 것이다. 일본이나 서양은 모두 같은 오랑캐이니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895년(고종32년)에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단발령이 내려져 고종임금부터 상투머리를 자르고 모든 남자들은 단발하지 않고는 외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최익현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며 저항하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의정부찬성,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청양으로 낙향,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1905년 우리의 주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16개에 달하는 일본의 죄상을 발표하고 곧 바로 의병을 일으키는 항일 행동에 나섰다. 의병활동에 함께 해 준 인물로는 제자 안병찬이 있었는데 그는 훗날 데라우찌 조선총독 암살미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전국에서 의병들이 최익현 선생의 휘하에 모여 들면서 활동영역도 전라도 순창, 태인까지 넓혀 갔다.

선생을 학자이면서도 '의병대장' 또는 '충신 최익현'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렇듯 행동으로 실천한 구국운동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6년 6월 순창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곧 바로 일본 대마도(쓰시마)로 유배를 가야만 했다.

▲ 면암 최익현선생 영정.  청양군 제공
▲ 면암 최익현선생 영정. 청양군 제공

대마도는 우리나라에 자주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입혀 왔던 왜구의 본거지.

선생은 이곳에 유배 와서도 일본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일생을 통해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 주었듯이 대마도에 와서도 그렇게 했다.

단식을 한 것이다. 일본이 주는 음식은 무엇이든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일본 관헌들이 와서 설득도 하고 위협도 가했으나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선생의 몸은 점점 쇠약해 졌고 마침내 1906년 11월 17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1907년 1월 5일 대마도를 출발, 부산을 거쳐 청양으로 향했는데 부산에서 논산 상월까지 이르는데 15일이나 걸렸다.

운구행렬이 지나는 고을마다 그를 애도하는 인파 때문에 그렇게 지체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논산 상월에 안장됐다가 2년 후 지금의 예산군 관음리로 옮겨졌고 '충절의 고장' 충청도의 정신적 거목으로 추앙 받고 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