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호 충북북부보훈지청 보훈과장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이 말은 김상옥 의사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를 거행하기 전인 1922년 11월 말 상해를 떠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남긴 말씀으로 조국의 독립에 대한 뜨겁고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김상옥(1889.1.5~1923.1.22) 의사는 가난한 가정형편에 어려서부터 말발굽제조 직공 등 공장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20대 초반에는 영덕철물상점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고 조선물산장려운동, 일본 수입품 배척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혁신공보’를 발간했다.

이후 김 의사는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운동이 갖는 한계를 느끼면서 무력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했고,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북로군정서의 도움을 받아 1919년 12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했다.

1920년 암살단의 일본 고관 암살 계획이 발각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해 후일을 기약하게 됐다.

김 의사는 상해에서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입단했고 1922년 12월 1일 다시 국내로 돌아와 1923년 1월 12일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이자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경찰의 추격을 피해 후암동(당시 명칭은 삼판동)에 있던 매제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긴 김 의사는 1923년 1월 17일 삼판동에서 총격전을 벌인 뒤 포위망을 뚫고 피신했으나, 1월 22일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경찰과 총격을 벌이며 3시간 동안 대치한 끝에 권총을 머리에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해를 떠나기 전, 이와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말씀을 남기신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와 같은 김 의사의 행적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철물상점의 경영 등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있었지만 만족하지 않고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는 데 있다.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김상옥 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일대천의 독립전쟁 영웅, 김상옥 의사의 독립운동사가 숭고하고 빛나는 것은 일찍 사업가로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초를 자초해 어머님을 비롯해 아내나 형제 그리고 자식에 이르도록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후대의 우리가 그 은혜를 잊어서는 결코 되지 않으리라!"

1월 12일은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일이다.

98년 전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저 없이 바쳤던 김상옥 의사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