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수능이 끝났다. 매해 수능이 치러질 때마다 모든 학생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대입을 위해 인생을 걸고 달려온 오랜 시간이 너무 아깝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의자 뺏기 놀이처럼 승패가 갈린다. 입학 학생들을 위해 놓인 의자의 수는 충분하지 않다. 누군가 먼저 앉으면 누군가는 다른 의자로 쫓겨나야 한다. 때문에 모든 입시생과 부모들은 명운을 걸고 십수 년에 걸쳐 대입을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건다.

아이러니한 것은 좋은 의자를 차지하거나, 쫓겨나거나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자살률의 통계를 보면 나타난다. 올해 대한민국 청소년 자살률은 OECD를 포함해 세계 2위를 기록했으며, 코로나 19의 팬더믹 상황에서도 사망의 원인의 1위도 여전히 자살이다.

유독 대한민국 청소년 자살률이 높은 것은 삶의 원리를 구성하는 우리 사회의 특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그 원인에 초점을 맞춰보면 청소년들에게 삶을 긍정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 교육의 실패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교육을 장악한 것은 노예의 원리다. 학교는 오로지 성적과 경쟁으로 아이들을 평가하고, 상위권 대학 진학만을 욕망하도록 그들의 꿈을 부추긴다.

대학에 진학했어도 현실은 달라질 게 없다. 대입을 향한 경쟁은 취직을 위한 경쟁으로 이어질 뿐이다. 대학에서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최고의 노동상품이 되는 것뿐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내 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없다. 이미 주어진 가치와 남이 욕망하는 것들만 쫓아 살다 보니 주관이 없는 텅 빈 존재가 된다. 우리의 교육은 개인으로부터 전체로 나가는 과정을 생략한다.

세상이 원하는 것만 추구하며 성장하다 보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나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에 있게 된다. 어느 대학을 나왔고 연봉이 얼마이며 직업은 무엇인지로만 나를 확인할 수 있다. 무엇 무엇에 '대하여'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는 나에게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

게다가 취업이 불안해지고 경제가 어려워지면 고통까지 추가된다. 인생을 통틀어 나를 최상의 상품으로 만들었지만 팔리지 않는다.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인지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양파처럼 한 겹 한 겹 외부에 의해 입혀진 직장과 학벌과 사회에서의 존재에서조차 나는 소외되어 있다. 겹겹이 있어야 할 양파의 한 겹 한 겹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없다.

그 근원에 교육의 비극이 있다. 개인이라는 주관이 사라지고 세계라는 객관만이 남은 교육은 내일로 나갈 수 없다. 개인이 발걸음이면 세계는 대지다.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대지를 박차는 마찰력에 있다. 발걸음과 대지의 마찰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라진 주관의 세계를 회복시켜야만 한다.

대학의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 성공을 위해 스펙만을 추구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만의 취향과 호기심을 발견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평가의 기준이 학점과 성적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얼마나 깊은 눈매를 갖췄는지 아직 없던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살펴야 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람은 극복돼야 할 무엇'이라고 했다. 극복의 대상은 이미 있는 가치와 남의 욕망으로 가득 찬 양파 같은 낡은 자신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 안에 있는 고유한 것을 욕망하도록 대학은 도와야 한다. 청년들이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바랄수록 상품화의 논리로부터 해방되며 삶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 된다.

노예의 교육에서 주인의 교육으로 변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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