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100] 日本 군사요충지가 된 大田

▲ 총독부는 대전역에 비치됐던 군인을 증원하여 1개 소대를 추가로 배치해 주변 철도 경비에 임하도록 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바라본 대전역. 대전시 제공
▲ 대전고등학교 맞은 편 자리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관사촌이 건설 되었다. 사진은 옛 충남도지사 공관. 대전시 제공
▲ 대전고등학교 맞은 편 자리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관사촌이 건설 되었다. 사진은 옛 충남도지사 공관. 대전시 제공

의병 막으려 '헌병고개'… 보문산엔 참호의 흔적남겨
의병 문태성, 역 습격해 일본 위협
천안 헌병대에 체포돼 압송됐지만
남은 의병들 이원역 등 습격 지속
총독부, 대전역 비치 군인 늘리고
옛충남도청→서대전 넘어가는 고개
헌병대 주둔시킨 뒤 접근 어려워져
경부선 역에 의병들 습격 잦아지자
대전에 제14보병연대 주둔시켜
대전고 맞은편 日장교 관사촌 건설

구 한말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문태성(文泰成)은 일본의 강압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충남 금산으로 숨어 들어 의병 활동을 했다. 그가 처음으로 활동한 것은 1907년 8월 24일 새벽 3시. 조치원과 천안 사이에 있는 소정리역을 습격한 것이다. 소정리역은 비록 조그만 시골 역 이었지만 이 역을 습격하여 일본의 운송 시스템을 마비시키겠다는 것이 습격의 목적이었던 것 같다.

또한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의병활동에 사기를 높여 주는 의미도 있었다. 소정리역 습격에 동원된 의병은 40명이나 되었다. (조선총독부 발행 '朝鮮鐵道史'참조)

역은 소실되었으나 일본인 역무원들은 모두 도주하여 인명피해는 없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등박문을 암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태성은 서울로 올라가 또 다른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경비가 삼엄하여 다시 금산 은신처로 내려 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인으로서 일본 헌병대의 첩보원 활동을하던 사람에게 문태성과 의병들의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첩보원은 현장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천안 헌병대에 알리기 위해 금산과 가까운 옥천 이원역으로 달려갔다. 역에는 철도 경비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충남을 담당하는 일본 헌병대가 천안에 있었는데 첩보원의 밀고는 마침내 큰일을 일으키고 말았다.

천안 헌병대는 병력을 이끌고 금산의 의병 근거지를 급습하여 지도자 문태성을 체포하고 다수의 의병들을 검거해 천안으로 압송한 것이다.

▲ 대전고등학교 맞은 편 자리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관사촌이 건설 되었다. 사진은 옛 충남도지사 공관.  대전시 제공
▲ 대전고등학교 맞은 편 자리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관사촌이 건설 되었다. 사진은 옛 충남도지사 공관. 대전시 제공
▲ 대전고등학교 맞은 편 자리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관사촌이 건설 되었다. 사진은 옛 충남도지사 공관.  대전시 제공
▲ 대전고등학교 맞은 편 자리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관사촌이 건설 되었다. 사진은 옛 충남도지사 공관. 대전시 제공

그러자 다행히 몸을 숨겨 검거되지 않은 의병들이 1909년 10월 24일 밤 이원역 습격에 나섰다. 의병들은 이원역에 들어가 경비전화를 끊고 불을 질렀다. 일본인 직원들은 마침 이원역을 통과하던 서울행 열차에 급히 올라타 도망치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원역을 습격하여 의병대장 문태성을 체포해간 일본 헌병대에 보복을 가한 의병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철도역 습격을 계속했다.

옥천역과 심천역도 습격해 철도를 마비시키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총독부는 대전역에 비치됐던 군인을 증원하여 1개 소대를 추가로 배치해 주변 철도 경비에 임하도록 했다. 또한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옛 충남도청에서 서대전으로 넘어 가는 고개에는 헌병대를 주둔시켰다. 그 때부터 이 고개를 '헌병 고개'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해방 후에는 국군 범죄수사대(CID)가 간판을 바꾸어 역시 접근하기 어려운 구역이 되었다.

그러다가 일본은 제14 보병연대를 대전에 주둔시켰는데 지금 충남대병원 자리에서 부터 서대전 사거리의 시민공원, 충남 병무청까지의 넓은 땅이 모두 주둔지가 되었다.

그리고 대전고등학교 맞은 편 자리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관사촌이 건설 되었다.

이처럼 처음은 7명의 분대(分隊)로 시작한 일본군이 연대 병력으로 급격히 규모가 커진 것은 대전을 중심으로 경부선 역이 의병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美·日전쟁이 시작되면서는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했을 때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좋은 곳이 대전이라고 판단, 급기야 서울 용산에 있던 사령부를 대전으로 이전시켰으며 보문산 일대에 참호를 파는 등 전쟁준비를 서두르기도 했다. 지금도 보문산에는 그 때 일본군이 파놓은 참호의 흔적이 있다.

또한 이 무렵 대전시청이 있는 둔산동에 군용 비행장을 건설, 전쟁에 대비하기도 했는데, 6·25때는 이 비행장에 미 24사단 지휘부가 설치돼 대전사수 작전을 총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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