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99 - '朴正熙 대통령'과 삽교천 방조제
치사 때 목소리 기운없던 박정희 대통령, 배수관문 열리자 흡족한 미소
행사 마친 뒤 호텔서 임신한 사슴 죽어… 朴, 그날 밤 궁정동서 암살당해

▲ 항공에서 바라본 삽교천 방조제 모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당진시 제공
▲ 박정희 대통령 모습. 당진시 제공
▲ 박정희 대통령 모습. 당진시 제공
▲ 삽교천유역 농업개발 기념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979년 10월 26일.

깊어가는 만추의 쓸쓸한 빛깔이 넓은 평야를 뒤덮고 있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이 열리는 행사장에는 이 지역 농민들과 관계기관장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악대의 연주는 한껏 분위기를 높이고 있었다.

이윽고 오전 10시가 되어 박 대통령이 손수익 충남도지사의 안내를 받으며 연단에 나타났다. 그 옆에 차지철 경호실장, 이희일 농수산부 장관도 서 있었다. 대통령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주민들을 향해 손을 들어 답례를 하고 곧 자리에 앉았다.

산업시설 준공식이나 농촌을 방문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는 박 대통령이었지만 어쩐지 이날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는 않았다고 참석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 무렵 부산, 마산의 학생시위가 심각하여 이른바 '부마사태' 때문에 대통령의 심기가 그렇게 불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군악대가 연주를 하는 가운데 유공자에 대한 표창을 하고 8분에 걸쳐 치사를 낭독했다. 치사는 준비된 원고가 있었으나 거의 자유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국토개발이야말로 국력을 기르는 확실한 길입니다.… 이제 삽교방조제가 완공됨으로써 이 넓은 평야에는 홍수나 가뭄의 피해도 없을 것이며 미곡생산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카랑카랑하고 쇳소리가 나는 대통령의 음성이 힘이 빠지고 약간 쉰 소리마저 났다. 사람들 가운데는 마침 불어오는 바닷바람 때문이려니 생각도 했지만 예민한 사람들은 대통령이 혹시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다.

이어 삽교천 방조제준공 테이프 커팅이 있었는데 대통령은 손수익 충남지사에게 여기 오신 노인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분을 모셔 오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새마을 모자를 쓴 노인이 수염을 나부끼며 나타나자 대통령은 그의 손을 다정히 잡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어 가위를 들고 테이프를 커팅한 뒤 배수관문 쪽으로 이동해 관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순간 갇혔던 물이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갑문 사이로 엄청난 물을 쏟아냈다.

대통령은 그 광경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으며 관중들도 박수를 치며 탄성을 질렀다. 이어 대통령은 공군 1호기 헬기를 타고 당진 송악으로 이동하여 KBS 시설 준공식에도 잠시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김성진 문공부장관 겸 정부 대변인이 대통령을 모셨는데 그는 몇 시간 후 박 대통령의 서거를 울먹이며 발표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 장관 역시 박 대통령이 여느 때와 달리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행사를 마치고 박 대통령은 공군 1호기 헬기에 몸을 싣고 도고호텔로 향했다.

이때가 10월 26일 오전 11시 40분.

그런데 대통령을 태운 헬기가 도고호텔에 착륙하는 순간 불길한 사고가 발생했다. 호텔 정원에 있던 사슴이 헬기 굉음과 바람에 놀라서 이리저리 뛰다 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것이다.

특히 이 사슴은 새끼를 배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길한 생각에 대통령에 보고도 않고 그냥 호텔 2층 리셉션 장으로 올라갔다.

손수익 충남지사가 환영사에 이어 건배를 했고 대통령은 특별히 좋아하는 막걸리잔을 비웠다.

그러면서 '공산당은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해야지 어중간한 중간은 없다'라는 등 말을 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무거웠다.

사슴의 죽음 때문일까?

간단히 점심을 마친 대통령은 공군 1호기 헬기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충남 땅에서 남긴 마지막 모습이었다.

청와대로 돌아간 그날 밤, 궁정동에서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삽교천에 함께 왔던 차지철 경호실장도 그렇게 죽고 말았다.

이렇게 준공된 삽교천 방조제는 당진·아산·예산·홍성 등 4개 시·군 22개면 24,700ha의 평야를 기름지게 하고 있으며 여기에 세워진 '삽교천 유역 농업개발 기념탑'은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이곳 주민들은 박 대통령의 동상을 세워 그 역사성을 기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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