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현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부 특임교수

불교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늘 변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이렇게 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변화를 간과하고 자신에 집착하는 일이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경직된 사고를 갖고 살면 세상살이에 쉽게 지치게 되고 나만 옳다는 독선(獨善)에 매달리면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살기 어렵다.

붓다는 다음과 같은 멋진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옛날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한 상인이 있었다. 이 상인은 하나뿐인 아들을 무척 사랑했는데, 어느 날 장사하러 나간 사이 산적이 와서 온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갔다. 상인이 자기 집에 가보니 집은 불에 타 있었고 새까맣게 탄 어린아이의 시체가 있었다. 상인은 그 시체가 자신의 아들인 줄 알고 슬피 울며 다음날 화장한 다음, 잠잘 때나 장사하러 갈 때나 그 유골함을 늘 목에 걸고 다녔다. 삼 개월 후 산적에게 잡혀갔던 상인의 아들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새로 지은 자기 집을 찾아갔는데, 그 불쌍한 아버지는 방에 누워 그 유골함을 끌어안은 채 울고만 있었다. 아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누가 놀리는 줄 알고 ‘썩 꺼지거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끝내 아버지는 문을 열지 않았고 아들은 그곳을 떠나버려 아버지는 아들을 영원히 보지 못했다.

참으로 슬프고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삶의 어떤 시점에서 어떤 생각이나 인식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면 마음의 문이 닫히고 만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찾는 여정도 끝난다. 당신은 진리를 찾지도 못할 뿐 아니라 진리가 다가와 당신의 문을 두드릴 때도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요즘 TV토론을 보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일수록 공론(公論)은 사라지고 편론(偏論)만이 판을 친다. 상대방의 주장을 진지하게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선입견과 정파의 논리에 따라 반대 논리만 찾기 바쁘다.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政治)에서는 공공의 의사를 수렴하는 소통(疏通)이 생명이다. 또 이러한 소통의 기본은 경청(傾聽) 즉 내가 말하기에 앞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맛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아직 맛보지 않은 어떤 것을 찾으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큰 스승들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집착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니, 너희는 늘 열린 마음을 갖고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놓아버려라. 그리고 이런 놓아버림을 일평생 계속하라.” 누군가는 나보다 더 좋은 대안을 갖고 있다 생각하고, 자신의 독선과 아집을 버리고 새로움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사고로 상대방을 대하는 세상이 됐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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