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훈 대전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재능과 노력이라는 주제는 적지 않은 청년들에게 좌절과 방황을 야기할 뿐 아니라, 나이든 사람에게도 후회와 반성의 계기가 된다.

특히나 즐기면서 일하는 자 누구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슬로건이 인기를 끌면서,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이 지향하는 일을 찾아 이에 몰두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됐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관심사와 재능이 있으며, 이를 싹 틔워 성장하는 것은 본인 뿐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나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얼마 전 2021학년도 대학 수시모집 지원 원서를 낸 학생이나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생의 재능을 찾고 이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할 것이다.

특히 인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는 학생들은 인생을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좌절감에 부딪히게 된다.

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문학은, 낭만적 대학 생활을 꿈꾸는 학생들이 선망하는 학과들이었다.

문학의 세계에 빠져보거나, 동양의 역사, 고대 그리스의 철학 등을 탐구하면서, 인간 삶과 사회 정의에 대해 고심하고 젊은 피를 데워보는 것은 많은 대학생의 통과 의례였다.

그러나 최근엔 어떤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자성의 목소리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당시의 인문학자들은 옳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나서는 인문학이야 말로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최후의 보루라고 주장했고, 인문학은 결코 자본의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를 역설하고 대비해온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제 문사철 3과 아니, 대부분의 인문학 계열은 원서 쓰기 기피하는 학과가 됐다. 인문학을 영어권 국가에서는 ‘liberal arts’ 즉, 자유과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 있는 지식인이 갖춰야할 폭 넓은 소양과 관련된 학문들을 의미하며, 직업 또는 전문적 능력을 강조하는 교육과는 구분된다.

자유과가 정립되던 고전시대에는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과 일반 서민의 차이가 극심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엘리트, 즉 자유로운 계층이 배우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자유과라고 불렸다.

대조적으로 의학, 법학, 공학 등은 섬기는 자의 학문으로 치부됐다.

자유과의 존속은 귀족주의, 자본주의 질서와 연계 돼 있다.

자본의 축적으로 특권 계층이 생겨나고, 그들이 누리는 여유가 자유과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빈부격차에 대한 반감과 새로운 계급주의 탄생에 대한 우려로 말미암아, 소위 자유과를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역으로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밥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들이나 배우는 학문’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렇지만 우리의 아이들 중에는 분명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밤 침대 속에서 이야기를 지어내며, 책을 읽은 것도 아닌데 인생의 모순과 불합리성에 몸서리치는 아이들이 있다.

음악과 미술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처럼,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아이들은 쓸모와는 상관없이 문학과 철학, 역사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들에게 억지로 수학과 공학을 가르치고, 시를 잣는 언어 대신 컴퓨터 언어를 배우도록 강요하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부모 입장에서, 의과대학 갈 성적이 안 된다면 여전히 전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데이터 사이언스 쪽을 지망하도록 다그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 역시 불확실한 미래에 지레 겁을 먹고, 문과를 전공하면 치킨 집 밖에 할 것이 없다며, 재능과 관심을 포기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추세다.

필자는 정신과 의사로서 이공계와 인문학 사이의 어정쩡한 사이에 놓여 있다. 한 쪽에서는 발전하는 뇌과학의 최신 성과를 따라가려 애쓰며, 또 다른 한 쪽에서는 현 시대를 관통하는 우리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 애쓴다.

이도 저도 아닌지라 어느 쪽 진영에게도 전문가라고 내세우기 어렵지만, 인문학적 관심을 질식시키지 않고 필자의 개인적 삶과 직업에 활용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허락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그러한 기회가 넓게 열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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