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95- 백제·신라 ‘사랑과 전쟁'
보과공주, 법흥왕과 사랑에 빠져 궁궐 탈출해 서라벌로 떠나 혼인
동성왕, 신라에 '혼인동맹' 제의… 고구려 남진 땐 협력해 세력 꺾어
신라 한강상류 101개 군 점령하자 혼인동맹 깨고 치열한 싸움도

▲ 부여 성흥산 사랑나무. 충남도 제공
▲ 서동요테마파크. 부여군 제공
▲ 서동요테마파크. 부여군 제공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전쟁도 많이 하고 결국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지만 두 나라 왕족 사이에는 혼인도 하고 멋진 로맨스도 벌어 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 된 로맨스는 신라 법흥왕이 왕에 오르기 전 백제 보과공주와 사랑을 나눈 것이 아닐까?

신라와 백제, 두 나라가 군사적으로 서로 협력하며 왕래가 잦았던 시절, 법흥왕은 국공의 신분으로 백제를 방문하여 여러 날을 보냈다. 이 때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와 눈이 맞아 깊은 사랑에 빠졌다.

신라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보면 '법흥왕이 국공으로 있을 때 백제에 들어가 보과공주와 사통하였다'고 기록했는데 '사통했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보과공주의 미모가 젊은 법흥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을 보아 두 사이를 짐작할 만 하다.

그러나 법흥왕은 백제를 떠나 신라로 돌아 왔고 얼마 안 있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올라 신라의 국가 체계를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백제의 보과공주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왕비도 맞아 들였다.

▲ 서동요테마파크. 부여군 제공
▲ 서동요테마파크. 부여군 제공
▲ 서동요테마파크. 부여군 제공
▲ 서동요테마파크. 부여군 제공

그런 줄도 모르고 보과공주는 법흥왕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평복으로 변장을 하고 궁궐을 빠져 나와 신라 서라벌로 향했다.

서라벌을 찾아 가는 여정은 만만치가 않았다. 쓰러지기 직전에 신라 왕궁에 도착한 보과공주는 궁궐 수비병들의 제지에 부닥쳤으나 결국 법흥을 만나고 만다. 왕도 보과공주가 서라벌까지 찾아 온 그 애틋한 사랑에 감동하여 그녀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 별궁에 머물게 하고 사랑을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보과공주는 법흥왕과의 사이에 아이도 낳았다.

이렇게 딸이 백제를 도망쳐 신라 법흥왕의 비가 된 사건을 겪은 동성왕은 493년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혼인 동맹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동성왕 제의를 기꺼이 받아 들여 이찬비지의 딸을 백제에 보내 혼인을 맺게 하였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 처음 나타난 '혼인동맹'이다. 이렇게 혼인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는 남진해 오는 고구려의 세력을 꺾는데도 힘을 합쳤다. 백제는 고구려에 빼앗겼던 6개 군을 회복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신라도 한강 상류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 역시 혼인동맹의 약효가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혼인동맹도 60년을 겨우 넘기고 554년 파괴되고 만다. 신라가 한강 상류 101개 군을 백제와 협의 없이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에 두 나라는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는 데 백제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들어가다 554년 지금의 충복 옥천 관사성에서 아깝게 전사를 하고 만다. 결국 혼인동맹도 국가의 이익과 충돌할 때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는 것.

혼인동맹이 깨어 진 것은 그 시대 한반도의 정치형국을 완전히 뒤바뀌게 했다. 한강을 확보한 신라는 중국으로 통하는 항로를 통해 교류를 할 수 있었고 마침내 중국 세력을 업고 한반도를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는 신라와 연을 끊고 중국에는 소홀한 틈에 나라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뒤늦게 일본 세력을 끌어 들였지만 이미 운명은 백제를 외면했다. 백제의 고도 부여에 가면 서동요테마파크가 있다. 백제 무왕으로 일컫는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를 테마로 공원화 한 것인데 역시 백제와 신라는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어떤 장애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역사는 재미있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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