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페루거리 관공서 벽면에 새긴 랭보 시 '취한 배' 사진=이규식

미증유의 혼돈 속에서도 가을은 다가온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려 시 한 편을 찾는다. 굳이 시집을 찾아 펼칠 필요도 없다. 지하철을 기다리거나 승하차시 스크린 도어에 적힌 시 한 편이 기다린다. 무료한 김에 끝까지 읽기도 하는데 이런 본의 아닌 시 독서를 통하여 얻는 느낌은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스크린 도어 벽면에 새겨 넣으려면 10여 행 분량이 적합하고 내용 역시 평이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서정 위주의 소품으로 치우친다. 지하철공사와 문인 단체가 정기적으로 작품을 선정하여 교체하는 이 지하철 시는 기성문인, 시민공모 작품 그리고 더러 외국시를 번역하여 올리기도 한다. 서울을 비롯하여 지역 각 도시 지하철과 버스정류장에는 어김없이 시를 소개하는 공간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 지역이 낳은 시인 작가의 작품을 도로, 보도 곳곳에 게시, 설치하여 지금 우리나라는 시가 풍부하게 제공되고 어디서나 시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SNS에는 문학작품 포스팅이 넘쳐나면서 작품의 수준을 막론하고 댓글이나 '좋아요'가 수십 수백 개씩 달린다. 일간신문에는 문인들이 소개하는 시 해설 코너가 빠지지 않고 신간시집 역시 하루에도 수십 권씩 출판 된다. 외형으로 본다면 이보다 더 풍요롭고 활발한 시창작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흔치 않을 것이다.

생산과 소비가 시장을 매개로 조절되면서 유통되는 구조가 일반적이지만 문학 특히 시에서 만큼은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고 수요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 공급초과 현상이 두드러진다.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시 전문잡지에서도 제대로 고료가 지급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판매가 저조할 것임을 예상하면서도 시집과 시 관련 서적은 출판된다.

모든 것에 대가가 따르고 경제논리로 치닫는 자본사회, 시장경제 체제에서 시가 베푸는 이 넉넉한 아우라는 분명 희귀하다. 100부 남짓 수요에도 불구하고 500-1000부를 찍어 주고받고, 원고료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기고하고 눈에 띄는 곳 어디에서나 시를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이 무상의 문학 환경은 경제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하나 소비재 상품인 도서를 서점에서 하루 종일 무료로 읽고 그냥 꼽아놓고 나와도 아무런 부담을 지우지 않는 미안한 현실도 그렇지만 각박하고 메마른 일상에서 시와 문학이 베푸는 풍성한 혜택을 온전히 즐길 여유조차 우리에게는 남아있지 않았을까. 시는 이렇듯 가까이 있는데 마음은 시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는 듯하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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