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지방행정조직 이어가
시장을 '부윤'(府尹)이라 불러
초대부윤 미군정 고문 황인식
미군정 3년동안 부윤 4명 역임
정부수립 후 첫 부윤된 손영도
첫 대전시장·초대 민선시장 돼
통일부 장관 손재식의 아버지
부윤·시장, 혼란기 직무수행 고통
6·25 전쟁 때 피란민 몰려들어
구호활동·물자 배분이 주요업무

▲ 대전 중구 선화동 NC백화점 사거리에 위치한 최초 대전시청이 있었던 자리의 현재 모습.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대전시는 1945년 해방이 되고 서도 서울 시장을 경성 부윤(府尹)이라했듯이 大田시장을 '대전 부윤'이라고 했다.

해방이 되었으나 정부수립이 될 때까지는 미군정하에서도 지방행정 조직을 그대로 이어 갔던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카프대령을 충남지사로 임명했고 그는 대전부윤에 미군정 고문으로 있던 황인식을 임명했다. 1945년 8월16일이다.

그런데 사실 미군정이 9월에 들어서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황인식 대전부윤 임명 날짜는 8월16일 이지만 그것은 소급 발령일 가능성이 크다.

황인식 부윤은 대전 부윤 발령이 나고 며칠이 안 돼 그해 11월 충남도지사에 임명된다. 그렇게 그는 미군정의 신임이 두터웠다.

미군정하에서의 첫 대전 부윤이 된 황인식은 1889년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 미국에 가서 대학을 마쳤다.

1929년 귀국하여 서는 영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미국이 진주하자 미군정청 고문으로 잠시 근무했고 바로 대전 부윤, 충남도지사 임명을 받았다. 1965년76세에 세상을 떠났다.

황인식이 충남도지사로 가자 그해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청은 방두환을 대전 부윤에 임명했다.

방두환은 동아일보 대전 지사장과 대전흥업 사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한 인물. 이어 1946년5월부터 다음 해 10월29일 까지는 충남 부여 출신 이석기가 대전 부윤으로 근무했다.

그는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충남 아산 군수를 역임한 행정가였으며 1950년에는 부여에서 국회의원(민의원)에 출마 당선된 것을 시발로 내리 3선을 기록,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중진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어 1948년 5월 유광준이, 그리고 1948년 10월30일 손영도가 정부 수립 후 첫 대전 부윤으로 임명된다.

그러니까 해방은 되었으나 미군정이 실시되는 기간에는 3년여 동안 4명의 부윤이 거쳐 갔으며 정부수립 후 첫 부윤은 손영도가 되겠다.

뿐만 아니라 손영도는 1949년 경성부가 서울시로, 대전부가 대전시로 명칭이 바뀌면서 첫 대전시장이 되었고, 시·읍·면장 선거제가 실시되자 초대 민선시장이 되었다. 당시는 지방의회에서 단체장을 선출했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 정부가 임명한 초대 대전 부윤, 초대 관선 시장, 초대 민선 시장을 다 역임한 행운의 소유자가 된 셈이다.

그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해방 후 충남 연기군수, 공주군수를 역임하며 행정력을 보였고 충남 부지사, 경기도지사, 부산시장, 통일부 장관을 지낸 손재식씨가 그의 장남이기도 하다. 대전 중·고등학교와 서울대를 졸업한 손재식씨 역시 아버지를 닮아 재임시절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하는가 하면 출장비가 남으면 국고에 반납하는 등 청렴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대전 부윤이나 시장은 해방 후 혼란기여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큰 고통을 겪었다. 식량배급이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식량부족이 그만큼 심각했던 것.

특히 6·25 전쟁 중에는 대전에 많은 피란민이 몰려들어 이들에 대한 구호활동과 주거 알선, 외국에서 오는 밀가루, 옷가지, 의약품 등 구호물자 배분 등이 주요 업무였다.

무엇 보다 이런 전쟁 혼란기에도 지방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시행됐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절에도 지방자치가 매우 중시됐음을 말하는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계속)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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