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나리꽃이 지고 있다.

한여름 땡볕에서도 영롱한 빛을 발하던 꽃잎들이 하나둘 땅에 떨어져 함초롬히 비를 맞고 있다. 꽃잎을 떨구고 빈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비바람에 간간히 흔들릴 뿐 꺾이지 않고 서있는 모습이 가히 도도하다.

찬란히 빛나던 태양도, 고고하게 내리던 달빛도, 별빛도 새벽이면 여지없이 이즈러지고만다. 언제까지나 머물 줄 알았던 내 젊음도, 청춘도….

엊그제 거울을 보다가 흰머리 두어 개를 발견했다. 한 갑자(甲子)의 세월을 살아온 연륜이 새치머리 몇 올이 뭐라고 눈에 들어온 순간 가슴이 쿵하니 내려앉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외모의 싱싱함도, 풋풋함도 내려놔야 한다는 걸 모르고 살진 않았지만 그날부터 거울 앞에 서서 자꾸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어보고 얼굴의 주름들을 문질러 보는 일이 잦아진다. 푸르던 나무도 가을이면 저마다의 빛깔로 색을 내며 단풍이 든다. 겨울로 향해가며 그 곱디 곱던 잎사귀들을 미련 없이 떨구어내는 것은 고된 삶에 지는 것은 아니었으리. 단단한 뿌리를 내리기위해 자양분이 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건 분명 이긴 것이 아니던가.

꽃이 지고 낙엽이 진다는 건 새로운 삶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유로운 쉼이고 기다림이다. 어떠한 시간과 조건에서도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의 순리 앞에 설 때마다 숙연해지고 찬사를 하는 것은 그들의 나이듦이 결코 경박하거나 추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꽃이 시들어 지는 것 또한 패배가 아니듯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음에게 지는 게 아니다. 세월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는 새로운 인생 여정의 시작이다. 그러니 흐르는 시간 안에서 육신의 변화도 낯설지 않게 초연히 내 것으로 받아드려야겠다.

은빛인생에서는 세상을 바로 보는 혜안을 더 환히 밝히고 후회하지 않게 경솔하지 않은 삶을 영위하며 앞으로의 시간들을 단풍처럼 곱게 물들여 가리라. 어느 날 머리가 온통 하얗게 물들어 간 다해도 지난 세월 속에서 내 삶의 무게들을 잘 견뎌왔다는 완숙의 흔적들이기에 자신을 도닥이며 겸허히 받아드리면서.

세상곳곳에서 숱한 이야기들로 역사를 만들며 올해도 어느덧 반 고개를 넘어 연륜에 한 살을 또 더하고 있다. 천천히 내딛는 발자국만큼 경솔하지 않은 사리분별력을 키우고 지혜와 현명함으로 삶의 잔망한 아름다움까지 일일이 사리어 느끼며 천천히 노년을 맞으리라.

살다보면 부질없이 흘러간 시간들을 후회도하며 지난날의 회한에 젖어 더러는 또 아파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상처는 눈물이 되기도 하지만 또 길이 되기도 한다 하지 않던가.

보내야 할 것들을 담담히 잘 떠나보내는 일들에서 익숙해지는 것이 또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라면 맞아들이는 일도 당당한 심경으로 내게 온 축복임을 감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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