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균 대전도시공사 사장

11월을 나타내는 영어단어 November는 9를 의미하는 라틴어 novem이 어원(語源)이라고 한다. 달력에 9월로 표기돼야 할 November가 엉뚱하게 11월의 이름이 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세계사를 바꾼 로맨스의 주인공이었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연합함대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역사상 첫 황제에 등극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했듯이 아우구스투스도 개혁정책의 일부로 역법(曆法)을 개정했는데 자신이 태어난 8월을 자기 이름을 따서 August로 바꾸는 등 새로운 로마력(曆)을 선포한다. 이전까지 9월을 뜻했던 November는 11월이 됐고 아우구스투스력은 몇차례의 수정을 거치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그레고리력)의 기본이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줄리어스 시저가 이집트 태양력을 도입하기 전까지 로마 달력에는 10월까지만 있었다고 한다. 한겨울이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11월과 12월은 아예 달력에 표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고장 출신의 나태주시인은 11월을 이렇게 표현했다. "돌아가기엔 /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 버리기에는 /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 어느 아침 보통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시간과 계절에 대한 정서가 묻어난다.

양력 11월은 겨울의 초입이다.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음력으로는 동짓달이라고 하는데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음력 11월에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는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이즈음부터 농작물이 자랄 수 없어 생산이 멈추게 되고 사회전체가 긴 동면에 들어갔다. 나태주 시인이 '버리기엔 아까운 시간'이라고 했지만 가장 진보한 문명권이었던 로마에서조차 11월은 버려진 시간이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했던 우리 조상님들에게 11월은 마냥 쉬기만 하는 달이 아니었다. 농가월령가 11월령에는 "등잔불 긴긴 밤에 길쌈을 힘써 하소 / 베틀 곁에 물레 놓고 틀고 타고 잣고 짜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기나긴 겨울밤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논밭에서 하지 못하는 생산활동을 실내의 길쌈질로 대체한 것이다.

회계년도의 기산일이 1월 1일인 정부와 각기관에서는 11월에 다음해의 사업계획과 예산을 결정하게 된다. 해마다 이맘때면 단골 뉴스가 되는 국회의 예산안처리 법정시한이 12월 2일 이므로 여야가 잘 논의해서 11월에 마무리 짓는 것이 순리라고 하겠다. 내가 근무하는 대전도시공사도 11월 이사회에서 2020년도 예산안을 확정짓게 된다.

어느 달이 더 중요하다고 따지는 자체가 우습지만 적어도 현대사회의 11월이 로마시대처럼 '버려진 달'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각종 행사로 어수선하고 연말연시가 임박한 12월보다 오히려 차분하게 다음해의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얼마 전 회의시간에 직원들에게 정밀하고 구체적인 계획수립이 다음해의 사업추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 적이 있다. 전략목표에 따른 실행계획이 수립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예산과 추진일정 등 세부계획이 촘촘하고 짜임새 있게 준비돼야만 원하는 성과에 근접할 수 있다. 이점은 기업이나 정부도 마찬가지고 그 시기가 바로 11월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11월은 내년 시즌에 대비한 마무리 훈련 기간이다.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11월에 수립한 계획이 다음해의 시민복리와 사회발전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무리 훈련 중인 야구 선수들 못지않게 굵은 땀방울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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