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억수 시인

운길산 수종사를 향해가는 길은 극락으로 향하는 착각을 불러온다. 마을길을 조심스레 지나면 사찰(寺刹)에 이르는 산길에 들어선다. 산길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가파른 경사로는 한참이나 아득하기만 하다. 차량으로 산에 오른다 해도 너무 급한 경사이기 때문에 운전이 서툰 사람은 차를 두고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나 한없이 힘든 산길만은 아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초록의 향연에 불자(佛子)가 아니더라도 절로 마음이 정화된다.

다산 정약용은 봄날 수종사에 오르는 기쁨을 "배에서 내려 한가로이 거닐며, 골짜기에 들어서니 그윽한 풍취 곱기도 하여라. 바윗가 풀은 아름답게 단장하였고, 산중 버섯은 우쭉우쭉 솟아 나왔네"라고 노래했다. 경내에서 눈을 들어 멀리 보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풍광이 아득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져 있다. 오죽하면 조선 초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은 "수종사에서 바라본 강물 풍경이 해동 제일"이라고 표현했겠는가. 고행으로 산에 오를수록 부처님을 참배하고 난 후 중생이 얻는 기쁨은 한량없을 것이다.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들으며 경내를 찬찬히 둘러보고 '삼정헌(三鼎軒)' 다도실로 향했다. 삼정헌은 시(詩). 선(禪), 다(茶)가 하나로 통하는 집(軒)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전통 차도(茶道)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다실 찻상에는 녹차와 다기(茶器)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절을 찾아온 사람 누구나 무료로 마실 수 있다. 보살께서 친절하게 요령을 설명하며 차를 우려 준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선구자인 초의선사(草衣禪師)가 다산 정약용을 만나러 올 때면 이곳 수종사에 머물며 차를 마셨다고 한다. 다산(茶山)과 초의선사의 차(茶) 사랑이 찻잔에 잘 우러난 녹차는 짙푸르지도 연푸르지도 않은 6월의 산을 담고 있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녹차의 색과 그윽한 향과 부드러운 맛에 잠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에 든 기분이다. 삼정헌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초록 햇살에 서거정이 바라보았던 옛 정취를 교차해 본다.

무위자연이란 자연에 따라 행위하고 사람의 생각이나 힘을 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사랑받고 싶어 한다. 나도 그동안 나서기를 좋아했다. 그래야 나의 존재가 빛이 나는 줄 알았다.

노자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밝게 나타나지 못한다. 자기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빛날 수 없다.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공적이 없어진다.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노자는 “진짜 자존감이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으로 느끼고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다실 입구에 마련된 시주함에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심호흡을 해본다. 그동안 분수도 모르고 활개 치고 다닌 행동이 부끄럽다. 앞으로 내 생각이나 주장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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