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 - 13 화가 장욱진(張旭鎭·1917~1990년)]

[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 - 13 화가 장욱진(張旭鎭·1917~1990년)]
일제치하 서양 미술 거부…조선 서민미술·민화 지켜

▲ 무제 : 캔버스에 유채 45.7×35.5. 1988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충청도의 인물을 일별할 때에 19세기에는 예산에 추사 김정희가 있었고 20세기에는 연기군 동면에 화가 장욱진이 있었다. 추사는 붓글씨로 청나라를 넘어선 인물이고 장욱진은 서양미술의 유입을 거부하고 한국적인 그림을 만드는데 일생을 바친 예술가였다. 이 두 분의 천재가 그 입장은 서로 달랐지만 외세와의 싸움에서 자기를 세우고 나라를 지킨다는 점에서는 한가지로 같았다.

20세기라는 시대는 서구미술과 그 영향을 받는 비서구권의 미술로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나라는 서구미술을 받아들여야하는 역사적인 현실에 당면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서양의 문물을 주체적으로 소화할 수가 없었다.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식민통치수단의 일환으로 미술정책이 꾸며진 때문이다.

이때를 당해서 화가 장욱진은 서양미술의 수용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우리나라에서 오직 장욱진 한사람뿐이며 비서구권전체에서도 그런 예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족의 전통에다 발을 담그고 조선의 서민미술 민화등 민속미술을 가까이 하였다. 서양미술에 물듦이 없었다. 일본미술에도 물듦이 없었다. 진정으로 참된 것을 찾아 면벽(面壁)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장욱진만의 세계를 그림으로 완성하고 지독한 고독 속에서 한 생을 살았다. 장욱진 같은 예술가는 이 땅에 다시는 못나온다. 그의 그림은 그런 혼자만의 전쟁터에서 싸워 이긴 승리의 기념비라 할 것이다. 장욱진은 싸워서 이겼다. 그림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는 혼자였지만 그의 그림은 이제 만인의 것, 만세상의 것이 되었다.

하아얀 화면에 네 마리의 새가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선생님 얘네들이 무슨 새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참새지" 그러셨다. 그러기에 "참새는 열지어 날지 않던데요" 그랬더니 "내가 시켰지!" 참으로 통쾌한 말씀이었다. 화면 위에서는 무엇이든지 화가가 시키는대로 해야하는 것이다!. ‘비교하지 말라. 나는 씸풀하다. 나는 술 먹은 죄밖에 없다.’ 이 말은 장욱진이 평생토록 외친 독백이요 절규였다.

장욱진의 고향 연기군 동면 안쪽 언덕에는 내가 만들어 세운 ‘非空張旭鎭塔碑’가 높다랗게 서있다. 봄은 가고 여름은 또 온다.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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