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 - 8 분청사기철화어문병 (粉靑沙器鐵畵漁文甁)]
조선 분청사기 소박한 풍모, 日 학자 조선도공 떠받들어, 서민적이고 꾸밈없는 매력

▲ 분청사기철화어문병(높이 28.6㎝.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분청사기는 다소곳하고 꾸밈새가 없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혀서 그 솜씨를 터득하며 마음 가는대로 손 가는대로 만들었다. 백자를 귀족 부인이라 한다면 분청사기는 시골 아낙 같은 소박한 풍모를 보여준다. 강하게 한국인의 품성이 표출되어 한국미술의 특색을 잘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귀중한 역사적 자산이 되었다.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최고의 찻잔이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임진년 난리 끝에 계룡산 도공들이 잡혀가서 일본 도자기의 원조가 된 것 또한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로 인해서 우리나라 분청은 쇠락의 길로 들어서서 이내 살아나지 못했다고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라는 민예학자가 조선의 미술을 극진히 사랑하여 더 없는 찬사를 선물하였다. 그의 예술론을 보면 조선의 도자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그 근저에 분청사기가 있었다. 예술의 근본을 조선도공들의 정신에서 찾으려 하였다. 무목적성, 무기교의 기교. 초월적인 것, 자유…. 결국엔 종교와 합일하는 것인데 조선의 도공정신을 그렇게 숭상하였다. 민간 장인들을 하대한 우리의 선대(先代)들과는 달리 그들을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한 야나기에 대해서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미술의 주인공들이 누구인가. 모두가 이름 없는 서민, 민간 장인들이 아닌가.

청자도 좋고 백자도 좋고 분청도 좋다. 우리나라 자기(磁器)는 중국과 또 달리 특이한 맛이 있다. 따로따로 보면 모르는데 한 방에다 함께 놓고 보면 확연히 그 정서가 다르다. 파리 동양박물관을 보는데 저 쪽 한 공간이 이상해서 쫓아가보니 거기에 한국도자기가 대 여섯 점 놓여 있었다. 형태의 있으므로 해서 주변공기가 그만큼 달랐던 것이다.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은 서민적인 것이고 꾸밈새가 없는 것이고 질박한 것이고 한국적인 고유의 순정이 배여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대표작들이 계룡산 가마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저 수 없는 무명 도공들을 위하여 그 넋을 기린다.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회원>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