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전란 속에 서울에 있던 대학들이 대전으로 피란을 왔지만 저마다 간판을 걸고 강의를 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전시 연합대학'이라는 것으로 피난 온 대학들이 한 곳에 모여 강의를 하는 등 학사운영을 했다.
하지만 1952년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전시 연합대학에 참여했던 대학들이 하나씩 둘씩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속에 당시 진헌식 충남지사가 우리 지역에 대학을 세우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진 지사의 이 주장은 도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했고 민간운동으로 전개됐다. 특히 국문학자 지헌영(1911~1981)선생의 역할이 컸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 재학 중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과 퇴교를 당하기도 했으며 한글학회 활동을 하는 등 충청의 대표적 국문학자이며 선비로 존경 받아 왔었다. 이렇게 하여 1952년 5월 21일 가칭 '충남도립대학설립위원회'라는 공식기구가 출범되었다.
위원장에는 진헌식 충남도지사가 맡고 이원양, 고인섭 등 10여명의 인사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 6월 30일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대학인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도립충남대학교로 출범을 하게 된다. 이 지역 첫 4년제 대학의 탄생이다.
초대 총장은 진헌식 도지사가 맡았는데 2대 성낙서 지사, 3대 이기세 지사로 이어지다 이기세 지사 때 '아무래도 총장은 학자가 맡는 게 좋겠다.'고 하여 충남대 문리대 학장이던 민태식 박사가 맡았다.
충남대가 처음에는 국립이 아닌 도립으로 출발했지만 대학도 문리과대학, 농과대학 두 대학 뿐이었다. 그나마 교실도 없어 문리대는 충남도청 자동차 차고에서 강의를 했고 농과대학은 대전농사시험소 축사를 강의실로 개조해서 사용했다.
그런데 자동차 차고는 자동차 기름 냄새가 진동했고 농과대학이 사용하는 축사는 소·돼지 등 가축 분뇨냄새가 심각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향학열에 불탔고 교수들 역시 열성으로 강의를 했다. 지금 현대적 건물과 광활한 캠퍼스를 자랑하고 있는 충남대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있다. 또 하나 충남대의 특기할 일은 학교를 세울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다. 625 전쟁을 치르는 나라, 그것도 지방자치단체로서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진헌식 지사가 제창한 것이 '일두'(一斗)운동이다.
한 가구당 여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을 충남대학교 건립비로 내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가마니를 짜서 한 장씩 내자는 운동도 했다.
요즘 같으면 특정 대학을 위해 이런 '준조세' 성격의 기부운동을 하는 것에 반발이 크겠지만 그 때는 호응이 컸다.
이렇게 도민들이 호응을 한 것은 도민들의 뜨거운 교육열과 진헌식 지사가 직접 시·군을 다니며 '우리대학, 우리 손으로 세우자'는 설득을 하며 진두지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충남대학은 지금은 비록 국립대학이 됐지만 전시임에도 보리 한 말, 벼 한 말 모아 준 충남도민들이 정신적 주주 인 셈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대전시도 충남도였다)
그 다음 문제는 대학 부지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채택된 곳이 지금 대전시 서구 괴정동 이었는데 이곳은 시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통학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부결되었다. 그런데 이곳이 지금은 대전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이 또한 격세지감이 있다.
이렇게 하여 겨우 채택된 곳이 지금 충남의대 자리 8000평.
여기에서 현 유성 캠퍼스로 옮길 때까지 25년간 충남대학의 기틀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