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산 유성온천역장
[시론]

10년 여 전 대덕구 근무시절 ‘대덕구(大德區)’를 ‘회덕구(懷德區)’로 바꿔야 한다는 향토문화인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조선 초부터 수백년간 회덕현으로 불리며 행정의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관아 터도 회덕동주민센터 자리에 있다는 이유였다. 대전(大田)과 회덕(懷德)에서 한 자씩 따온 ‘대덕’보다는 덕을 품은 곳이란 뜻의 회덕이 지역 정체성에 더 어울린다는 주장이다. 오로지 지명 때문에 대덕연구단지가 대덕구에 있다는 전국적인 오해를 사고 있다는 점도 큰 불만이었다. 당시 지역 소외론이 팽배해 있던 시기여서 꽤 설득력 있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자연스럽게 도시발전이 진행됐다면 대덕구가 아니라 대전시도 회덕시나 진잠시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조선시대말까지만 해도 현재의 대전지역은 공주목 관할의 진잠현과 회덕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전이란 지명이 지금처럼 눈부신 성장을 한 것은 전적으로 철도의 힘이다. 역사적으로 대전은 약 500년전인 1530년 조선 중종 때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공주(公州)의 산천을 설명하는 가운데 ‘대전천은 유성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고 소개했다. 1905년 그저 그런 논밭이 대부분이었던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 한복판에 경부선철도가 들어서고 대전역 간판이 세워졌다. 1914년에는 호남선이 개통했다. 이해에 회덕군과 진잠군 일부를 포함해 대전군 대전면이 설치됐다. 대전읍 승격(1931년), 충남도청 이전(1932년), 대전시 승격(1949년)에 이어 직할시(1989년)와 광역시(1995년)로 커지면서 현재 152만 인구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대전의 철도는 역사적인 사건을 남겼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잡힌 미군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펼쳐졌다. 미 특공대원 30인과 함께 3명의 철도기관사가 작전에 참가했고, 이중 김재현 기관사가 적탄에 맞아 숨졌다. 대전역 광장에는 이들의 영웅적인 애국혼을 기리는 동상이 서 있고, 대전국립현충원에는 당시 사용한 미카-129 증기기관차를 개조한 호국 열차 박물관이 당시의 실상을 전해 주고 있다.

철도는 대전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1960년대 초반 상영된 영화 ‘대전발 0시 50분’에 삽입된 노래 ‘대전부르스’는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가요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대전역 플랫폼에서 파는 뜨끈한 가락국수를 먹으려 일부러 열차에서 내린 고객도 적지 않았다. 칼국수가 대전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 된 연유도 철도 덕분이다. 50~60년대 미국 원조물자인 밀가루가 다량 유입돼 대전역 주변에 제분소가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이 쉽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으로 칼국수가 자리 잡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전국 최대 규모의 철도관사촌, 등록문화재 제168호인 철도보급창, 철도차량정비단 역시 대전에 들어섰다. 현재 대전역에는 30층 규모의 코레일 본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쌍둥이 빌딩으로 마주하며 철도산업의 총본산 역할을 맡고 있다.

철도가 없었다면 대전이란 지명도, 전국 5대 도시로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어느 도시도 대전만큼 철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이 없다. 대전은 한국 철도의 역사와 자부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도시의 탄생과 성장, 문화, 시민의 삶, 애국혼까지 철도와 연결돼 있다. 국립철도박물관이 담아야할 역사와 비전, 가치와 콘텐츠가 바로 이곳에 있다. 철도가 낳은 도시, 철도가 키운 도시, 바로 대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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