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한때 글을 쓰며 밥을 먹고, 다시 글을 쓴 후 밥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왜 그렇게 배가 고팠는지 모르겠다. 신기한 일은 소화 장애를 일으킬 것 같았는데 오히려 식탐이 강해졌다는 사실이다. 1㎏, 2㎏…. 어떤 날은 하루에도 1㎏이나 살이 불었다. 완전한 사육이었다. 폭력적인 음식으로 창자를 가득 채우니 몸뚱이도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무거워진 머리와 가슴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유지의 목적을 가진 60조 넘는 세포들이 곤죽이 됐다. 생각에도 근육이 붙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근육에 기억력이 생긴 결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도 몸이 저절로 먹을 것을 찾았다. 창자를 비워본 적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기도 그만큼 어렵다.

▶먹는 방송(먹방)이 유행이다. TV채널을 돌릴 때마다 누군가가 열심히 퍼먹고 있다. 늘씬한 처녀들을 이용해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에 '음식 포르노’라고 부른다. 발가벗겨진 위장, 남김없이 노출된 미각의 충돌은 음식의 근본을 잊게 한다. 볼이 터져라 우적대는 모습을 보면 침이 넘어가다가도 숨이 넘어갈 듯 처절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더 말라깽이가 될 수 있을까 경쟁하는 시대에 뚱보가 되라고 유혹하니 이율배반이다. 뚱보는 폭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각적으로도 이미 생선과 고기는 입안의 침샘을 살찌운다. TV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라면 앞에 앉아있는 '무의식의 의식'을 한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살기 위해 먹기보다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떠드는 '먹방'이 그래서 고약하다.

▶인간의 입맛만큼 주관적인 판단은 없다. 채식주의자 식탁에 오른 스테이크는 짜증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반대로 고기파에게 샐러드는 풀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배부르면 산해진미도 먹기 싫고, 배고프면 술지게미도 싫지 않다. 음식에도 언어가 있는 법이다. 음식의 언어는 혀로 맛보는 음식에서 마음으로 맛보는 음식으로 미각을 확장시킨다. 미각세포는 혓바닥에 있지만 맛은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옛것인데 인스턴트를 들이대니 몸에 병이 든다. 마구 먹어대는 '먹방'의 전성시대는 달리 얘기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역설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일본이 그랬다. 당시 일본은 버블 팽창과 붕괴를 거쳐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긴 침체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먹방을 보며 허기진 속을 달랬다. 고도 경제 성장기를 지나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 지금의 우리와 닮았다.

▶스테이크 한 조각이 위장에 10년 동안이나 남아있다는 걸 상상해보라. 폭식은 살인의 이데올로기다. 몸은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에 착하게 다뤄야한다. 먹음으로써 비워지지 않는다면 그건 시각적 허기에 불과하다. 상실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음식이 자꾸 좋아진다고 말하지 마라. 음식이 나를 탐내는 것이다. 답이 없다는 게 정답인 것처럼….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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