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애 수필가
[목요세평]

모처럼 장거리 운전을 하게 돼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 좋던 날씨가 끄무레해지더니 금세 굵은 장대비를 쏟아냈다. 갑자기 변해버린 날씨에 쌩쌩 달리던 차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처럼 삐뚤빼뚤 중심을 못 잡고 휘청댔다. 도로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고 시야는 점점 어두워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선 땀이 나고 바짝 긴장된 어깨와 등은 마른 명태처럼 뻣뻣해졌고, 잔뜩 긴장한 발은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 차가 곡예를 하듯 꿀렁댔다.

앞에 가던 트럭이 자지러지듯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얗게 질리고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이성을 잃고 도로 한복판에 그대로 멈추어 서고 말았다. 뒤따라오던 차들이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려댔지만, 석고처럼 굳어버린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만약에 이대로 멈춰 있으면 사고의 위험성은 커지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팔다리가 후들거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다 무심코 얼굴을 감쌌다. 그 순간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툭 하고 떨어지며 눈앞이 환해졌다. 나는 검은색 선글라스가 가려버린 세상에 갇혀 분별력을 잃고 헤매는 가엾은 존재였다.

안경이 사물을 더욱 잘 볼 수 있도록 돕는다면 선글라스는 색깔에 따라 사물을 왜곡하기도 한다. 검은색을 쓰면 검게 보이고 붉은색을 쓰면 붉게 보인다. 만약에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면 이 왜곡의 창에 갇혀 심각한 편견에 빠지게 되거나 판단의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얼마 전 한 고위공직자가 "민중은 개·돼지이니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망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그는 마음에 선민의식이라는 선글라스를 낀 것이다. 그가 낀 선글라스는 선량한 민중을 개·돼지로 보이게 했다. 취중 실수라고 변명했지만 그러한 막말 저변엔 오만방자한 특권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도 고위공직자들이나 특권층 사람들이 내뱉는 막말은 자신이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의 색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색안경에 갇혀 사람이 개·돼지로 보이게 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그들이 마음에 만약에 투명한 안경을 썼더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동물적 색안경은 민중을 개·돼지로 비하하는 잘못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선글라스는 유용하지만 이중적 잣대를 지녔다. 지나친 우월감에 젖어 있는 사람이나 배알이 꼬인 사람들은 짙은 색안경 뒤에 숨어 제멋대로 판단하거나 휘둘러댄다.

민중을 개·돼지로 본 고위공무원을 향해서 '공무원은 개·돼지에 기생하는 기생충, 진드기다'라고 내뱉은 문인도 있다. 민중은 개·돼지고 고위직 공무원은 기생충 진드기라면 이 나라는 개·돼지와 기생충의 나라란 말인가. 편견의 색안경은 이렇게 바보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 편견의 색안경을 벗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의 길로 가고 말 것이다. 선글라스의 중요 기능은 눈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 이외에 다양한 기능이 있지만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잘못을 저질러선 안 된다.

선글라스는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고 멋을 창출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지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무시하는 도구가 아니다. 편견의 안경을 벗고 격물치지의 안경으로 세상을 볼 때 모두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내가 배려하고 사랑해야할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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