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퇴근길에 대폿집에 앉아 선문답에 빠졌다. 푸른 핏기의 하얀 소주를 들이키던 무명씨가 물었다. “일하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일하는가?” 필시 ‘일의 보람’을 묻는 것일진대 선뜻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누구나)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을 한다. 일에서 보람을 느끼려면 능력을 인정받아야하고, 월급봉투가 두툼해야한다. 그런데 야근을 ‘밥’ 먹듯 하지 않으면 ‘밥(돈)’은 따라오지 않는다. 만약 보람보다는 돈이 더 필요하다고 털어놓는다면 아예 ‘밥줄’이 끊길지도 모른다. 무명씨는 히노 에이타로가 쓴 ‘아, 보람 따위(는)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책을 권했다. 많은 직장인들에게 읽히고 있는 이 책은 '사축(社畜·회사에 매인 가축)'에 관한 얘기다.

▶노예형 사축은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외근무를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충견형 사축은 충성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몰락까지도 함께한다. 기생충형 사축은 일은 못하면서 필사적으로 회사에 들러붙으려는 유형이다. 주머니형 사축은 상사나 선배의 비위를 맞추며 회사 내 지위를 확보하려고 전력을 다하는 유형이고, 좀비형 사축은 일개 직원의 본분을 망각하고 아예 경영자처럼 군다. 이들의 대화법은 이렇다. “혼자 집에 가니까 좋냐?” “남들 야근하는데 안 찔려?”

▶영화 속 대사들만 훑어봐도 갑(甲)들의 선민의식이 들끓는다. “①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들입니다. 뭐하러 개, 돼지들에게 신경 쓰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②세상 참 평등해졌어. 그죠? 이젠 개나 소나 골프 친다고 깝치고. 평등 이게 좋은 게 아닌데 정말.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꼭 못사는 것들이 잘사는 사람들 다 따라 하려고 해요. ③너희들이 먹고 자고 싸고 입고 쓰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다 나 같은 사람이 너희에게 동정심으로 베푼 거라고. ④암만 봐도 우리나라 참 살기 좋은 나라 아입니까. 뭣보다도요, 우리나라가 젤로 좋은 건요. 없이 사는 것들이 지들끼리 치고받고 한다는 겁니다. 지들끼리 멱살 잡고 죽어라 싸워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부려 먹기도 쉽고요.”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이 말을 실제로 입 밖에 꺼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보나마나 열정 없는 사원으로 낙인찍히고 '칼퇴근'만 생각하는 얌체족으로 여겨질 것이다. ‘사축’이 되지 않으려면 내려놓아야한다. 노동에 저당 잡힌 인생을 탈출하기 위해선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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