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여보, 당신, 자기, 부인, 임자, 와이프, 안사람, 집사람, 마누라, ○○엄마….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 이렇게나 많다. 하지만 애칭이 별칭으로 바뀌는 순간 아내는 야, 이봐, 어이~, 거기~로 전락한다. 그나마 여보는 낫다. 은근하게 존중의 뜻을 비치는 ‘여보’는 '여기 좀 보시오'에서 나왔다. 굳이 한자로 표현하고 싶다면 如寶(여보:보배처럼 소중한 사람)로 쓰면 된다. 또 당신(當身:마땅할 당, 몸 신)은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내 몸과 같다'는 뜻이니 퍽 괜찮은 애칭이다. 외국에선 베이비(baby), 허니(honey:벌꿀)처럼 달달한 애칭이 단골이다. 남편을 뜻하는 허즈번(husband)은 '집을 묶는 사람', 와이프(wife)는 '피복을 짠다'는 의미다. 남편은 틀을 만들어 주고, 아내는 그 틀에 무늬를 넣어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누라는 마립(頭)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두머리(頂上)를 뜻한다. 하지만 '마누라'를 '마주 누워 자는 여자', '남편과 같이 못 있고 마루 밑에나 있는 여자', '마주한 누나', '마, (이제) 누우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우스개소리다. 말(言)은 ‘사상의 옷’이다. 무시하는 듯한 호칭도 피곤하고 지나친 극존칭도 피곤하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휴대폰이 울리십니다" 등 '을의 언어' 또한 피로를 가중시킨다. 가령 황제폐하, 대통령 각하도 너무 엎드린 호칭이어서 껄쩍지근하다. 이처럼 호칭은 언필칭 딱 ‘중간(무례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은)’이어야 좋다. 아무리 '님'을 100개 갖다가 붙인들 존경심이 없다면 그건 ‘님’이 아니라 ‘놈’이다.

▶필자는 아내에게 애칭을 쓴다. 아내의 애칭은 이쁜이를 뜻하는 ‘쁘니’다. 그녀는 필자를 ‘때지’라고 부른다. 손해보는 느낌이지만 ‘때지’는 돼지라는 뜻이다. 지금도 스마트폰이 울리면 ‘때지’라고 뜨고 ‘쁘니’라고 뜬다. 벌써 25년이 흘렀으니 그 닭살스러움이 한이 없다. 사실, 연애할 때는 같이 있다가 돌아서면 또 보고 싶었다. 어떤 날은 헤어지고 나서 곧바로 그녀의 집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활활 타는 장작불이 아니라 은은하게 타는 화롯불이었다. 죽었나 하고 뒤적거려 보면 빨갛게 불씨가 살아 있는 그런 화롯불…. 하지만 이젠 그런 애칭이 조금은 민망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애칭’이 붙는 순간 얼굴에 밥풀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절묘한 슬픔이다.

▶부부란 긴 세월 함께하다보니 얼굴 표정까지 닮는다. 울고 웃고 표현하는 감정방식이 서로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식성과 생활습관이 같아져 병까지 닮는다는 연구도 있다. 부부는 100점과 100점이 만나는 게 아니라 50점과 50점이 만나 100점을 향해 가는 것이다. ‘자기’는 한없이 사랑스럽지만 ‘마누라’는 한없이 사람스럽다. 그래서 감정을 무장해제시킨다. 사랑이 변하는가, 아니면 사람이 변하는가. 가정의 달이다. 그 옛날 달달했던 애칭을 다시한번 슬쩍 꺼내보라. 꽃이 필 것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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