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어둠이 깔린 밤, 어둠사이로 적막감이 내려앉는다.

비까지 추적추적, 아주 궁상맞게 내린다. 빗소리가 커질수록 눈물방울도 커진다. 막걸리와 파전이 생각날 법도 한데 그것마저도 이물스럽다. 빗소리를 천천히 캔다. 빗소리는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져 결국 그림자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외롭다. 아파트여서 볼륨감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분명히 양철지붕 때리는 소리와 처마 때리는 소리가 동시에 난다. 지나가는 차바퀴에 눌린 웅덩이의 빗물도 처벅거린다. 특히 밤에 내리는 비는 어둠을 삼키고 있어 더 진하고 애달프다. 어둠은 반드시 빛을 품는다. 빛을 품지 않으면 어둠이 아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난다.

▶희망은 보편적으로 빛으로 표현되고, 절망은 어둠으로 대체된다.

어떤 '희망'을 얘기하다가도 이내 '어둠'이 깔리는 것은 우리 사는 세상이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적인 화법을 통해 절망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우린 늘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을 응시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응시하고 있는 그곳엔 절망적 생과 어두운 삶이 교차한다. 그 어둠의 심연은 다분히 불편하다. 조금만 지켜봐도 그 고통이 마음으로 느껴진다. 등대는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불빛들이 모여야 비로소 밝아진다. '나'를 빛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빛내기 때문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그리운 법이니까.

▶맑은 날에는 우산은 그냥 우산이다.

더더구나 우산처럼 흔해빠진 것도 없어서 아무데나 두었다가 잃어버리기 일쑤다. 급할 때 찾으면 없는데, 평소엔 헌신짝 다루듯 한다. 잃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잃어버리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산은 다음 비오는 날까지 제자리에서 현신한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으면, 헌신짝처럼 다뤘던 우산의 행방이 그립다. 우산은 주인이 비를 맞지 않도록 제 온몸으로 비를 맞아왔다. 우산의 소중함은 온몸이 비에 다 젖었을 때 생긴다. 친구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는 건 궁색한 도피다. 같이 우산을 쓰면 둘 다 비를 맞게 돼있다. 왼쪽에 있는 친구는 왼쪽 어깨가, 오른쪽에 있는 친구는 오른쪽 어깨가 젖는다. 차라리 비를 맞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서 같이 비를 맞는 게 우정이다.

▶어둠은 본디 쓰지만 뱉을 수 없는 쓴맛이다.

그런데 맛 문제의 본질은 보다 근원적이다. 우리가 단맛 중독에 빠진 것은 돌아가는 꼴이 온통 쓴맛이기 때문이다. 이럴 땐 ‘우산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설령 왼쪽 어깨가 젖을지언정 함께 갈 사람이 절실한 것이다. 평소엔 외따로 있다가도 외로울 땐 기꺼이 동행할 수 있는 ‘우산’ 같은 사람이 너무도 그리운 세상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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