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꽃이 좋아진다. 꽃이 좋아지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역설이다. 스마트폰으로 꽃을 찍는 사람의 8할은 중년이다. 왜 찍는지 자신도 모른다. 그냥 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사소한 행위는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기록하는 일이다.

삶의 궤적과 족적을 남겨 하루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인 없는 꽃은, 꽃세(稅)를 내지 않아도 마음껏 볼 수 있다. 결국 주인 없는 꽃은 주인 없는 꿈이다. 허락받지 않고 꿀 수 있는 유일한 꿈이다. 주인 없는 그 꽃의 정령은 꽃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조선 성종시대를 뒤흔든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은 버려진 꽃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기생으로 전업해 왕실의 종친들과 놀아났다. 그녀는 꽃이 피고 달이 밝은 저녁이 되면 정욕(情慾)을 참지 못했다. 왕실, 평민, 노비와 운우지정을 나눴다. 그녀에게 홀린 수십 명은 귀양을 갔고 어우동 또한 교형(絞刑:목을 매어 죽임)에 처해졌다.

또 한명의 ‘주인 없는 꽃’ 유감동(兪甘同)은 세종시대의 기생이다. 그녀 또한 본래는 양반가문 출신 여성이었으나 외간남자(外間男子)에게 강간당한 후 남편에게 버려졌다. 이후 간통한 남자가 40명이다. 세종은 교형에 처해달라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살려 귀양 보냈다. 버려진 꽃이, 꽃이 되고자 했으나 또 버려진 것이다.

▶어우동과 유감동은 기생이었지만 시인이었다. 이들은 버려졌으나, 버려진 것 또한 아니다. 그들도 버린 자를 버리기 위해 다시 꽃을 피웠다. 씨방을 열고 한껏 몸을 달궜다. 배겨날 수컷은 없었다. 눈물로 피워냈기에 그 향이 짙고 독했다.

나비도 모으고 새도 모아 더 많은 씨앗을 잉태했다. 복수다. 명예수복을 위한 벼름이었다.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사랑을 희롱한 치명적인 ‘꽃’이었다. 주인 없는 꿈이었다. 과연 두 여인이 꿈꾸고자 했던 조선시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단언컨대, 이들은 섹스에 굶주린 요부가 아니라, 사랑에 굶주린 그냥 ‘꽃’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금기와 억압 속에 '꽃'들이 명멸했다. 이들은 손가락질 당했지만 제도 밖에, 집 밖에 있었다. 이제 딸의, 딸의, 딸들은 더 이상 주어진 팔자를 끼고 살지 않는다. 이제 스스로 치명적인 향기를 풍긴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끝났다. 이 꽃 역시 버려진 꿈과 버려질 꿈으로 분화된다. 민초(民草·백성)들은 주인 없는 꽃으로 살았지만, 이제 그 꿈을 좇지 않는다.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꽃이 아니다. 우린 주인을 뽑은 게 아니라, 하인을 뽑은 것이다. 버려진 꿈이 아니라, 버릴 꿈들이다. 찬사와 분노로 뒤범벅이 되는 ‘피의 꽃’은 4년마다 피고진다. 우린 어떤 꽃을 원하는가. 밤마다 킁킁대는 정치의 꽃을 또 피울 것인가.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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