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봄인가 하고 창밖을 내다보면, 여전히 냉기가 서성댄다.

다음날 또 봄이 왔나 둘러보면 바람 끝이 여전히 맵다. 샛바람이다. 파종을 준비해야 하는 농부들의 지청구가 요란하다. 먼저 나왔던 여린 봄싹들이 움찔거린다. 이렇듯 '봄'은 부드러운 어감과 달리 제법 변덕스럽다. 하늘거리는 미풍이 불다가도 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분다. 솔솔 부는 실바람이 왔다가도 옷섶을 파고드는 살바람이 매섭다. 때론 보드라운 명지바람이 들렀다가도 회오리처럼 부는 소소리바람이나, 좁은 틈으로 황소바람이 속을 얼린다. 그래도 이 세상의 초목들은 봄바람을 타고 열심히 새싹을 밀어 올린다. 그래서 봄은 은밀하게 오종종 온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봄바람은 분홍빛이다.

여린 햇살을 튕겨내며 꽃잎이 벙글어지기 때문이다. 봄은 잎사귀에 따사로운 봄물을 들여 연둣빛이기도 하다. 봄볕이 좋으니 풀꽃들이 솟아난다. 그 사이로 냉이 달래 쑥 향기가 여린 손을 내민다. 가만히 있어도 동네 처녀 가슴에 봄바람이 난다. 그래서 봄은 '가을 타는 남자'보다 그 향기가 더 짙다. 춘정이다. 이 농염한 춘정은 몸의 섞임(정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이다. 여성은 나무(木)에 속하고 봄은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계절이니 잉태다. 겨우내 뿌리에 저장한 자양분을 각 가지에 전달해 새 생명을 피우니 합궁이다.

▶봄 햇살에 등허리를 맡기면 식욕이 솟는다.

애쑥에 밀가루 오소소 뿌리고 된장 한 숟가락 버무려 보글보글 끓여 내거나, 냉이를 모시조개와 함께 끓인 반상(飯床)은 맛깔지다. 흰 속살과 연둣빛 몸매를 아낌없이 드러낸 쑥전, 하얀 뿌리 고슬고슬하게 뒤엉킨 냉이무침, 채반 위에 놓인 오신채(五辛菜)도 달디 달다. 오신채는 부추, 파, 마늘, 달래, 평지(겨자과 유채), 무릇, 미나리 중 다섯 가지 색을 맞춰 무쳐 먹는다. 가만히 보면 모두들 풀뿌리다. 옛말에도 풀뿌리를 먹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했으니, 햇나물은 보약이다. 그래서 봄은 밥을 부르고 사랑을 부른다.

▶산기슭에 소보록하니 깔린 산수유 꽃무리를 보니 봄이 오긴 왔다.

봄은 이처럼 찰나에 핀다. 삽시간에 온몸에 수액을 가득 올린다. 겨울동안의 헐벗은 대지. 그 캄캄한 고독의 시간을 온전히 견뎌냈으니 봄의 축제가 시작되는 건 당연하다. 봄은 누리는 자의 것이다. 봄이 온들 칩거하면 봄도 칩거한다. 그냥 내어주는 법이 없다. 봄에 나누는 사랑은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홍채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봄의 진액은 달다. 인생의 봄날을 꿈꾸는 정념은 그야말로 질투다. 시샘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차가움 속에서 따뜻함을 찾으니 봄의 소요(騷擾)다. 진짜 봄은 때때로 불어대는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두렵지만 설레는 것이다. 세상사 돌아가는 꼴이 영 봄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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