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문의 窓]
충북본사 편집국장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중략…)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란 시를 통해 소쩍새의 슬픈 울음도, 먹구름 속에서 울던 천둥소리도, 간밤에 내린 무서리도 모두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산통으로 풀어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한 생명체의 신비성을 감득할 수 있다.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끝낸 수험생과 학부모 역시, 요즘 인동초처럼 모진 세월을 견뎌내며 한해의 끝자락을 맞고 있다.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상아탑에서의 멋진 꿈을 꾸는 이들도 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성적표를 쥐어들고 희망보다 낙망이 앞서는 이들도 있을테다. 수험생과 다름없는 1년의 세월을 함께 했건만 햇볕은 온기를 잃고, 뺨을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학부모들도 적지 않을 테다. 자식과 똑같이 수험생으로 생활했던 학부모들의 한숨이 그래서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무릇 곡식은 심은 대로 거두고, 땅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열심히 심고 거두려 해도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대학입시가 그렇고, 자식농사가 그러하다.

바야흐로 배반의 계절이다. 자칫 대학도 나를 버리고, 세상도 나를 외면할까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수험생이나 학부모 모두 다를 게 없다. 학벌지상주의가 낳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작금의 사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교육제도와 입시제도 탓이다. 대입 전형도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정권이나 장관이 바뀔 때마다 각종 명분을 내세워 수험생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악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본디 ‘태평성대’엔 배반이 없는 법이다. 혼란기나 격동기에 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교육정책은 늘 혼돈 속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북도내 한 특성화고교는 이러한 조삼모개식 교육정책을 따라잡기 위해 상고에서 인터넷고로, 또 상업정보고등학교로 몇 년에 한번 씩 교명을 바꿨다고 한다. 그동안 수 없이 많은 대학 입시를 치렀지만, 매번 바뀌는 입시정책에 혼란을 겪어야 하니, 배신감도 크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반성이 없다. 정권에 따라 장·차관들도 각자도생이다. 늘 변명이다. 자기 합리화만 있을 뿐이다. 백년대계(百年大計)는커녕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불안한 정책은 우리 학생들의 미래를 멍들게 할 뿐이다.

이러한 창세전과 같은 허튼 교육정책으로 수험생들은 수능을 끝냈다는 안도감보다는 혼돈 속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또 다른 눈치작전에 여념이 없다. 학부모들도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속에 낭만적이고 사변적(思辨的) 생각에 잠겨 노변한담(爐邊閑談)을 나누기 좋은 계절이지만, 그마저도 사치(?)라 여기고 있다.

이른바 명문대학 진학을 위해 지난 12년간 뒷바라지했던 수고로움이 서열화 되는 입시지옥 속에서 희비가 교차될 운명에 놓여 있다. 누구는 명문대 합격증을 손에 쥐고 축배를 들겠지만, 누구는 떨어지는 낙엽과 같이 추락하는 현실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이란 게 늘 승자와 패자로 나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세상살이가 다 그러하듯 어제가 있으니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는 게 아닌가. ‘종즉유시(終則有始)'의 각오가 필요하다.

이 땅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이여!

'끝나면 다시 시작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 혹독한 배반의 계절을 이겨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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