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당]류용환 대전시립박물관 관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디케(Dike)는 사법부의 상징이다. 이 디케의 여신상이 서울 대법원은 앉아 있는, 우리 대전에 있는 솔로몬파크에서는 서 있는 모습이다. 

다른 점은 또 있다. 대법원에서는 눈을 뜬 채 한 손에 법전을, 솔로몬파크에선 눈을 가리고 한 손에 칼을 든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 손에 천칭(天秤)이란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은 모두 같다.

본래 정의 또는 정도를 뜻하며 질서와 계율을 상징한 여신상 디케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신이기 때문에 눈을 가리지 않아도 공정히 심판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이성이 발달하면서 눈을 가린 여신상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이성이 개입되며 선입견과 주관으로 공정한 판결에 영향을 줄 것이란 생각이 예술가의 감성과 맞물리어 근대 이후 주로 눈을 가린 여신상을 낳았던 것이다.

사법부 상징의 여신상 저울처럼 학문에는 문형(文衡)이란 저울이 있다. 글월 문(文)에 저울대 형(衡)으로 이루어진 문형은 조선시대 대제학의 별칭이었다. 

대제학은 궁중의 경서와 문서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홍문관(弘文館)과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기록하며 명을 받아 사신의 외교적 언사를 작성하는 예문관(藝文館) 수장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대제학은 과거 볼 때 내주는 글 제목인 과제를 내고 채점하는 일을 관장했다. 

요즘 말로 공무원시험의 출제와 채점은 물론 면접과 특별전형까지 일괄 전담하는 출제위원장이자 채점관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출제위원의 신변은 극비로 다루어진다. 출제위원이 무엇을 전공하고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알면 문제가 어떤 분야에서 어떤 유형으로 나올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제학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과거의 과제가 달라지고 모범답안이 달라지므로 과거를 준비하는 모든 선비들은 공부 범위 및 사고방식과 문투 또한 대제학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즉, 대제학이 한 나라의 지적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생긴 고전적 은유로 '문형(文衡)을 잡다'란 표현이 있다. 

좌우에 접시를 매달은 천칭은 저울대 중심을 어디로 잡는가에 따라 같은 물건과 같은 저울추라도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문형이란 저울에 오르는 것은 쌀이나 포목, 금과 은이 아니라 한 시대의 독서 경향이자 사상의 유형이고 모든 지식인의 정신적 균형이므로, 문형을 잡고 저울대의 중심을 결정하는 사람이 정신적 문화적으로 얼마나 막강한 위치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영의정조차 부러워하는 대제학은 조선시대 벼슬의 꽃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에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는 성균관의 공자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묘 배향은 사후에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당대 학자의 꿈은 대제학이었다. 

이런 대제학은 임금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었다. 보통 관리 임명은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3명을 추천하면 임금이 그 중 하나를 낙점하는 식이다. 그러나 대제학은 예외적으로 문관들의 투표로 뽑았다. 

먼저 낭관(郎官, 정5~종6품)들이, 다음에는 대부(大夫, 정1~종4품)들을 상대로 원을 그리는 권점(圈點)이란 투표를 실시하여 최고 득표자가 단수로 임금에게 추천되며, 임금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임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제학은 한번 취임하면 죽거나 스스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임금이 면직시킬 수도 없었다. 

작금에 벌어지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을 바로잡을 문형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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