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의 월요편지]<30>
배재대 석좌교수

우리에게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유명한 페터 비에리는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정신 세계와 철학적 인식 등, 폭넓게 인문학 분야를 아우르는 저서들을 출판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책은 ‘자기결정’과 ‘삶의 격’이 있습니다. 앞의 소설과 두 권의 철학서적을 관통하는 개념은 ‘자기결정’과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자기결정은 존엄성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인데, 어떤 상황에 휩쓸리거나 타인에 휘둘리지 않고 모든 삶의 변곡점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스스로 결정할 때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화하면 자기결정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에 대해 철저히 되묻는 자기 인식을 전제로 하며, 다양한 방면의 교양을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문화적 정체성을 가꾸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타고난 것들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는 자기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규범과 독립성’을 강조합니다. 규범은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인데, 그런 맥락에서 규범이 없으면 존엄성도 행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독립성은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스스로 지휘하고 연출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존엄성’은 ‘삶의 격’에서 주된 개념으로 다루어집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정신적 자산은 존엄성이지만 삶 속에서 가장 위협받기 쉬운 가치이기도 합니다. 과연 어떻게 존엄성을 지키며 품격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작가의 주된 관심입니다. 작가는 존엄이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법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사고와 경험, 행위의 틀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존엄한 삶의 형태를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했는데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세 가지 물음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어떤 취급을 받느냐 하는 것은 타인에 달려 있지만, 내 품격을 스스로 지킬 때 타인도 나의 존엄성을 파괴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생각과 태도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존엄은 타인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도 결정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켜진 존엄, 손상된 존엄, 잃어버린 존엄이라는 일상적 경험 안에서 서로 얽혀져 있으며, 특히 존엄성이 지켜지지 못할 위기 속에서는 더욱 복잡성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태도는 타인을 보는 관점에 영향을 주고, 이것은 다시 타인이 우리의 존엄에 영향을 끼치는 범위와 정도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엄이라는 것은 다층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나 스스로에 있다고 규정하면서도, 작가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밖에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하며,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의무감에서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때문에 자기결정권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존엄성은 자기 존중의 사고와 연관되어 누구나 각자 스스로가 책임을 지는 감정과 행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지요. 존엄성은 자기 존중의 사고이고 존엄성의 상실은 자기 결정의 상실과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페터 비에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존엄성과 자유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내가 보는 바로 그 방식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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