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김태섭 한국은행 기획조사팀 과장

지난 9월 서울대 공대교수들은 ‘축적의 시간’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향후 개선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구조적인 저성장을 보이고 있는 이유를 모방적 실행전략의 한계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선진국이 갖고 있는 기술들을 모방·개량하면서 압축적인 성장을 이뤘으나, 이제는 중국 등 여타 신흥국들도 이러한 성장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영역에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제시돼야 했지만, 논문 게재 실적을 중요시 여기는 학계, 현장에 당장 적용가능한 기술만을 중요시여기는 기업의 풍토 등으로 인해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선진국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을 ‘100년 이상의 시행착오 경험’으로 들고 있다. 선진국들은 이러한 시행착오 경험을 통해 핵심기술을 획득했으며, 이를 우리나라와 같은 추격국가들은 공개된 논문, 특허를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기술을 가진 외국계 회사와의 합병을 통해서도 얻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나라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의 압축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축적을 위한 열린자세와 시간을 갖자고 제안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인센티브 체계를 바꿔 모든 경제주체가 축적을 지향하도록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창조적인 축적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비단 서울대 공대 교수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코닝(Corning)사는 특수 유리, 세라믹 소재 및 광학 부문에서 오랜기간 독보적인 기술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회사이다. 동 회사의 CEO(최고경영자)인 웬델 윅스 회장은 얼마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닝이 자신의 부문에서 지속적인 혁신을 이뤄내는 배경으로 ‘완벽을 기대하는 동시에 실패를 허용하는 문화가 조성된 것’을 거론했다. ‘아이디어의 대부분이 처음부터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혁신은 근본적으로 실패에 근거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웬델 윅스 회장 자신도 2000년대 초 닷컴 버블 붕괴 이후 자신이 이끌던 사업부문의 실패를 책임져야 했지만, 회사에서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현재의 코닝사를 일줘냈다.

이러한 점을 감안, 우리 충북지역의 경제도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열린자세와 시간을 갖고 창조적인 축적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다행히, 충북지역에서는 이러한 축적의 노력들이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다. 오송바이오벨리에서는 국내 주요 바이오업체와 연구지원기관이 입주해 해외 유수의 바이오업체와 어께를 나란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솔라밸리에서는 유수의 태양광업체와 기술지원기관이 집적돼 그리드 패리티(grid parity·태양광 발전단가와 화석에너지 발전단가의 균형점) 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화장품뷰티, 유기농 등의 산업도 국제엑스포 개최 등을 통해 경험을 축적해 나가는 중이다.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이러한 노력들이 항상 성공을 거둘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시도들도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축적의 시간’으로 이해하고 격려해 준다면 경제주체들이 더욱 자신감을 갖고 나가갈 수 있을 것이다. 도내 경제주체들의 노력이 시행착오를 용인해주는 열린 자세를 가진 가운데 이뤄져 충북경제가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이루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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