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전인준 음성여자중학교 교사

올해로 한글날이 569돌을 맞았다. 한글날은 어느 날 갑자기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자격을 빼앗겼다가 슬그머니 그 자격을 돌려받았다.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 두었던 물건을 누군가 허락도 없이 빼 내 갔다가 아무렇지 않게 슬쩍 도로 넣어 주며 선심쓰는 것 같은 석연찮음이 있다. '이런 전차로 어엿비 너겨' 우리는 10월 달력에 빨간색으로 인쇄된 9라는 숫자를 반갑게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인터넷에 한글날을 검색하면 그 역사적 의미나 의의보다는 한글날이 휴일인가를 궁금해 하는 질문들이 주를 이룬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종대왕이 훌륭한 이유는 휴식을 제공하셨기 때문인가?

돌이켜보니 최근 10년 간 학교에 근무하면서 한글날을 교육적으로 기념하는 행사를 제대로 치른 기억이 없다. 너무나 많은 행사와 대회들 그리고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교육과 강연들이 점점 많아지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한글날 행사는 넘어갈 수 있으면 고마웠다. 한글날에 대한 기억이 발렌타인데이 만도 못하니 쉬는 날인가만 궁금할 밖에…. 부끄럽지만 올곧게 가르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반성해야겠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즐겁게 기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여러 대회에서 하듯이 표어를 쓰고 캐릭터를 그리고 3행시나 4행시를 짓는 건 이제 아이들이 식상해한다. 대회의 특성 없이 주제만 바뀔 뿐 분야가 똑같으니 형식적으로 대충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제출이라도 하면 정성이 갸륵하고 고마울 정도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글을 이용해 의상 디자인을 해보았다. 2명이 짝을 이뤄 하나의 작품을 제출토록 하여 소통과 협력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필자가 근무하는 곳이 여자 중학교여서 그런지 아이들은 종이로 옷을 만들고 한글을 디자인하여 무늬를 넣는 것에 완전히 빠져 들었다. 색색의 종이로 윗옷, 치마, 드레스, 앞치마, 한복, 수영복 등 다양한 종류의 옷을 만들었다. 한글로 디자인을 할 때는 조선 시대의 한글 모습을 잘 모르니 아이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고어와 사라진 음운들, 그리고 순우리말 등을 스스로 찾았다. 검색 과정에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유, 제자 원리, 한글의 우수성, 창제 당시의 한글 모습과 변천, 한글날의 제정 과정 등을 덤으로 알아갔다. 정보의 바다에 미끼를 던지면 아이들은 만선의 기쁨을 건져 올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필자의 눈에는 옷을 만드는 과정의 아이들이 하늘땅만큼 더 아름다웠다. 완성된 옷을 몸 앞에 들거나 입고 단체 사진을 찍어 줬더니 자기네만 따로 찍어 메시지로 보내 달라고 했다. 적어도 이 아이들은 한글날에 즈음해 한글을 생각해 보았다는 기억은 간직하리라.

먼 훗날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한글날이 빨간 날인가를 검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의 손을 잡고 태극기를 함께 달고, 그동안 잊고 지낸 한글날의 의미를 찾아 정보의 바다에 입수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글자가 있기에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으로서 우리 민족답게 살 수 있음에 감사하기를 바란다. 정보 과학이 발달될수록 더욱 빛나는 우리 글자의 우수성에 자부심을 느끼기를 바란다. 오늘 같이 좋은 날, 가까운 청주의 한글 사랑관으로 나들이를 가면 어떨까?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