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속 역사이야기⑧]신경직 LH공사 충북본부 현도사업단장

남북 관계가 냉탕 온탕을 오가면서 긴장관계가 고조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어느 때보다 통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 충청도는 휴전선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 통일에 대한 체감지수를 느끼는데 한계가 있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국가인 통일신라가 건국되는데 있어 주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들이 이를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충남 논산군 부적면 관동리(官洞里)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한 시골마을이라 지명 자체에 별 이야깃거리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이곳은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군을 승리로 이끈 관창(官昌·645~660)의 활약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때는 서기 660년 여름. 백제의 대장군 계백이 백제를 침공해온 김유신의 5만 군대를 막기 위해 5000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지금의 연산리, 신암리, 관동리, 천호리 일원)에 진군해 5000의 군대로 5만의 신라군을 맞아 싸워 저지하게 된다. 이때 신라군에는 관창이란 어린 화랑이 있었다. 관창은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홀연단신으로 적군 속으로 말을달려 백제군과 싸우다 백제의 포로가 되었는데, 계백은 관창이 아직 어린 소년으로 그의 용맹에 탄복해 죽이지 않고 신라군에게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재차 적진으로 내달려 용감하게 싸우다가 다시 포로가 됐다. 계백은 결국 그의 목을 벤 후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군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신라군은 관창의 용기에 고무돼 모두가 결사의 각오로 싸워 마침내 백제군을 대파하게 된다. 이 때부터 이곳을 화랑 관창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관창골, 관골, 관저골로 불리워 오다가 오늘의 관동리로 정해졌다고 한다. 이 관동리의 지명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전무퇴로 죽음을 맞이한 어린 화랑 관창의 애국혼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상목리(上沐里)’와 ‘계양(桂陽) 마을’의 이름을 따서 상계리(上桂里)라 부르게 된 마을이 있다. 계양마을은 삼국통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곳 상계리는 삼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김유신 장군하면 당연 경주나 가야지방을 떠올리겠지만 정작 김유신 장군이 우리지방인 진천군에서 태어나 무술을 연마하고 통일의 염원을 키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계양마을은 김유신 장군의 후손들이 장군을 모시는 ‘계양묘(桂陽廟)’를 지어 제사지낸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또, 인근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었다 하여 태령산, 김유신 장군이 말을 타고 무술을 닦았다고 하는 투구바위와 치마대 등이 전해오고 있어 장군의 기개를 전해주고 있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忠谷里)에는 탑정호수가 조성돼 있어 논산에서 가장 나들이 가기 좋은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 충곡리는 신라군에 맞서 결사대 5000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백제의 영웅 계백장군이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이를 증명하듯 백제의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매장했다고 하는 가장골(假葬)이 있고, 인근에 충장산(忠蔣山), 충훈산(忠勳山), 수락산(首落山) 이라는 지명이 장군의 최후를 전해 주고 있다. 비록 패장이긴 하지만 삼국의 통일과정에서 분명 무게감 있는 역할을 하였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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