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일현 사진작가

원고 뭉치를 정리하다가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유독 마음을 끌었다. 2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군중들을 어쩌지 못하고 반대편에 대치한 전투경찰 대원들이 밀리는 사진이다. 그 사진을 유심히 보니 길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낯이 설지 않았다. 건물은 그대로이다. 변한 것은 없다. 단지 리모델링을 했을 뿐이고 밋밋했던 건물들에 현란한 광고판이 장식됐을 뿐 모든 것이 그대로이다.

전경대원들은 방패를 들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했음인지 주춤주춤 밀려 상당공원 쪽으로 퇴로를 정하며 시위대에게 2차선 도로를 내주고 있다. 시위대들은 밀리는 전경대를 압박이라도 하듯이 주먹을 불끈 쥐고 무엇인가 외치고 있다. 아마도 민중가요를 부르고 있었으리라. 시대는 가고 없다. 그러나 여기 한 장의 사진이 남아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인도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환호하는 시민들과 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 모두가 보기에 야릇하다. 8월의 뙤약볕이 작열했음인지 간혹 손으로 햇빛 가리개를 하고 있다. 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들은 드물고, 청바지에 소매 긴 반팔 흰 셔츠 차림이다. 남자들도 다르지 않아 셔츠 바람에 청바지나 기지바지를 입고 무리에 섞여 있다.

사진의 전경에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여인이 있다. 운동화에 흰 티셔츠, 청바지에 잘록한 허리를 마치 돋보이기라도 하듯 질끈 동여맨 허리띠, 단발머리에 단정하고 강인한 인상이다. 사진을 확대해 찬찬히 들여다본다. 화장기 없는 민낯이다. 턱 선은 군더더기 없이 예리할 만큼 날렵하고 양 볼은 환하고 복스럽다. 콧날은 그리 높지 않고, 이마는 훤칠하니 시원스럽다. 그리 짙지 않은 눈썹, 길지 않은 속눈썹, 쌍꺼풀은 아예 없다. 조선의 미인도를 보는 것 같다면 다소 과장일까. 미인도와 차이가 있다면 아스팔트 위에 앙버티고 있는 그 가녀린 몸매에서 느껴지는 기운이랄까 싶다. 아니, 봉긋한 젖가슴과 동그마한 어깨 위로 치켜든 주먹, 냉랭하리만치 선뜩한 눈빛이 쏘아내는 시대에 대한 원망기가 미인도와 구별 짓는 터이리라.

난 이미지를 통해 세상의 이면을 읽는 사진가다. 그러다보니 시대정신에 민감하고, 사건 현장을 쫒기도 한다. 한번은 시민단체에서 주관하는 ‘평화의 소녀상’ 봉안식에 참석한 일이 있다. 식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청소년 광장은 해도 설핏 기울고 고즈넉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 한적한 틈을 타 소녀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소녀들이 재잘거리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소녀상 앞에서 참배를 하더니만 나름 토론을 하며 역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애써 거리를 유지하며 소녀상과 소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하, 순간 이들에게서 소녀상의 이미지를 보고야 말았다.

잘록한 허리와 봉긋한 가슴 위로 동그마한 어깨 선, 이목구비가 두렷이 소녀상을 닮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소녀상엔 시대에 대한 원망기가 내쏘는 듯 싶은 눈빛에 은결들어 있고, 소녀들의 눈빛엔 선한 의지와 열정이 검은 눈망울 속에 풋풋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80년대의 여학생과 소녀상, 요즘의 소녀들에게서 같으면서 다른 것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듯 싶다. 80년대의 여학생 사진에선 시대에 대한 원망기를 변혁 의지로 깨트려보려는 오연한 눈빛을 보았다면, 소녀상에선 아직도 풀지 못한 은결든 눈빛이랄까, 못내 원한을 풀지 못해 절규하는 눈빛이다. 다행인지 요즘의 소녀들에게선 풋풋한 젊음답게 이지적이고 선한 눈빛이 아름답게 보였달까, 질곡의 시대를 살아왔던 세대로서 나는 이들의 눈빛이 마냥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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