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속 역사이야기]⑦|
신경직 LH공사 충북본부 현도사업단장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동학농민혁명을 들 수 있겠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왕조시대를 끝내고 근대사회로 가는 분수령을 마련했다는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일반적으론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리 충청도 역시 전라도 못지않은 동학혁명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이는 당시 동학농민군과 관군 간의 처절했던 싸움의 현장과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지명(地名)이 증명하고 있다.

청주시 서원구 충대로1에서 모충동(慕忠洞)으로 넘어가는 ‘모충고개’란 지명이름은 동학농민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충사에서 유래된 모충동은 1894년 9월 동학농민전쟁 때 대전 방면에서 집결한 동학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충청병영의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가 교장(敎長) 박춘빈(朴春彬)과 대관(隊官) 이종구(李鍾九) 이하 70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진했다가 청주시 강외면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기습공격으로 모두 전몰한 것과 관련이 있다. 조선은 병사들의 순절행적을 기리기 위해 1894년 11월 목사 임택호(任澤鎬)가 남석교 밖에 모충단(慕忠壇)을 설치했다. 1903년 안종환(安宗煥)의 건의로 순직한 장교의 증직과 모충단의 단호가 하사됨에 따라 그들을 배향하면서 이곳의 지명이 모충동으로 바뀌게 됐다. 한마디로 모충동의 지명은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가슴아픈 역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화성리에는 시성산(屍城山)이라고 불리는 높이 약 220m의 산이 있다. 한자로는 시체(屍)가 성(城)을 이룬 산(山)이란 뜻이다. 이 산이 역사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조선 고종 31년(1894) 갑오동학혁명 때였다. 이곳의 동학접주로 있던 김복룡은 천안, 전의, 목천 일대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후 이 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에 조선은 이두황을 대장으로 삼아 일본군과 합세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게 된다.

당시 토벌군은 조직적인 훈련과 함께 신식무기로 무장돼 있었고, 동학농민군은 죽창으로 대응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관군대장 이두황이 크게 놀라 총 쏘는 것을 중지케 했다.

하지만, 이미 죽은이가 수백명으로 시체가 산을 이뤄 성처럼 쌓였다는 뜻에서 시성산(屍城山)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또, 피가 흘러내린 시성산 골짜기를 피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송장배미’라는 연못이 있다. 이름부터가 뭔가 무시무시한 사연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이 곳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가장 처절했던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10만여 동학농민군이 사상자를 내며 패퇴한 이후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집단으로 묻힌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우리 충청도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있는 유서깊은 지명이름이 산재해 있는 만큼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해 보인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